(49) 석대들에서 어산촌으로 밀려난 농민군

최혁 남도일보 주필의 남도동학 유적지
 

(49) 석대들에서 어산촌으로 밀려난 농민군

日軍 화력에 밀린 농민군 남면 어산촌으로 퇴각

표영삼 선생 “전투개시 4시간만에 농민군 자울재까지 퇴각”

위의환 선생 “어두워지고 길 좁아 매복기습 우려 일군 철수”

조일연합군 물러가자 장흥농민군 재집결해 옥산촌전투 준비
 

건산 모정등
동학농민군 중 일부 병력은 건산 모정등에 모여 장녕성 공격을 준비했다. 1894년 음력 12월의 날씨는 매우 추웠을 것으로 생각된다. 만약 눈이 내렸다면 당시의 모정등은 사진과 같은 모습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1970년대에 촬영된 건산 모정등 모습.

■표영삼 선생의 <장흥지역 동학혁명연구>중 장흥전투부분 발췌.

동학혁명 중 최후 전투라 할 수 있는 장흥 지역 전투는 (1894년 음력 12월) 13일에 막이 오른 것이다. 뒤이어 15일에는 석대벌 전투, 17일에는 옥산촌(玉山村) 전투로 이어지면서 일본군의 야만적 살인행위가 시작되었다.

<순무선봉진등록>에는 “13일 새벽에 적세를 탐지하니 남문 밖에 수 천 명이 집결해 있었다. 일본군과 본영 병정 30명이 합세 공격하니 수합(數合)이 못되어 적은 사방으로 달아났다. 세차게 추격하여 20여 명을 포살하니 나머지는 죽을 힘을 다해 달아나 다시는 나타나지 않았다”고 하였다.

화력이 약한 동학군은 제대로 싸워 보지도 못하고 남면 어산촌 본진으로 후퇴한 것이다. 어산촌(語山村)에 집결해 있던 이인환·이방언 대접주와 동학지도부는 여러 대책을 검토한 끝에 15일 새벽에 일본군을 공격하기로 하였다.
 

장흥 관산
동학농민군과 조일연합군의 전투가 벌어졌던 관산. 관산은 1894년 음력 11월 25일 대흥(大興, 현 관산읍) 대접주 이인환(李仁煥)이 농민군을 이끌고 봉기한 곳이다. 석대들 전투에서 패한 농민군은 12월 17일 이곳에 재집결해 최후의 일전을 준비했다.

<순무선봉진등록>12월 21일자 이진호(李珍鎬) 교도대장 보고에 의하면 12월 15일에 동학군은 일본군과 관군을 포위하고 맹공을 퍼부었다. 그러나 백목 중위가 일본군 지원부대를 끌고 오자 역습으로 바뀌면서 석대벌과 자울재에서 많은 동학군이 희생되었다고 하였다.(중략)

남면 어산촌에 집결해 있던 동학군 지도부는 병력을 보강하기 위해 보성과 해남, 영암 동학군에게 지원을 요청하였다. 장흥, 강진 농민군이 합세하자 농민군의 수는 며칠 사이에 3만여 명으로 늘어났다. 북쪽에서 패전하여 밀려 내려온 많은 동학군들도 합류하였다고 본다.

15일 아침 선발대는 장녕성 북서쪽 산봉우리 일대를 차지할 수 있어 선제공격에 나섰다. 후속 병력도 계속 줄을 이어 들판을 메웠다. 당시 일본군 2개 지대 약 200명과 경군 60여 명은 장녕성안과 남문 옆 남산 봉명대에 진을 치고 있었다. 전투가 시작되자 강진으로부터 백목 중위가 일본군 60명과 교도대 약 30명을 이끌고 나타났다.
 

장흥 남산전투지
동학농민군은 남산 대밭에 매복해 있던 일본군의 습격을 받아 큰 피해를 입었다. 왼쪽 능선 아래 대나무 밭이 당시 일본군이 매복해 있던 장소다. 대밭 우측에는 지금 장흥문화예술회관이 들어서 있다.

성암(聲菴) 김재계(金在桂)의 증언에 의하면 12월 15일에 어산촌에 본진을 둔 “이인환·이방언은 보성, 장흥, 강진, 해남, 영암 각 군의 포(包)를 합하여… 북상(나주)을 도모하던 때에 정부군과 일본군이 장흥에 내주(來駐)했다는 소식을 듣고… 수십만 동학군을 지휘하여 장흥읍으로 직충(直衝)하다가 석대벌(石臺坪)에서 결전을 벌였다”고 하였다.

처음에는 자신만만했으나 일본군의 계략에 빠져 산림지대에서 평지로 나오게 되자 전세는 불리하게 되었다. 월등한 화력을 가진 일본군과 경병은 동학군이 접근할 수 없는 거리에서 사격하니 당해낼 수가 없었다. 화승총과 창칼이 고작인 동학군의 무기는 상대가 되지 않았다.

2시간이 지나자 동학군의 전열은 흐트러지기 시작하였고 끝내 무너지고 말았다. 싸움터는 석대벌에서 송정리로, 다시 자울재로 옮기면서 약 4시간에 걸쳐 혈전을 벌였지만 수 백 명의 희생자를 낸 동학군은 패배하였다. 일본군과 경군은 날이 어두워지자 추격을 포기하고 돌아갔다.
 

장흥 석대들
3만여명의 농민군들은 장녕성을 공격하기 위해 장흥으로 집결했다. 산 기슭에 진을 쳤던 농민군은 일본군의 유인전술에 걸려 넓은 들판으로 나오는 실수를 저질렀다. 일본군과 관군은 사거리가 먼 신식총과 기관총을 이용해 농민군을 사살했고 결국 농민군은 자울재를 넘어 후퇴할 수 밖에 없었다.<장흥동학농민혁명기념관 제공>

■조일연합군의 자울재 회군에 대한 위의환 선생의 글

장흥지역 사학자 위의환 선생은 조일연합군의 자울재 회군에 대해 다음과 같은 견해를 내놓고 있다.

15일에 벌인 석대혈전에서 조일연합군이 크게 이겼지만 오전에 있었던 농민군의 기습공격에 크게 놀랐던 모양이다. 일본군과 관군은 점심도 제대로 먹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이는 교도중대장의 보고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어서이다.

“20리 되는 자오현(自吾峴·자울재)까지 추격하자 이 때 해는 서산에 걸려 있고 북풍 찬바람은 불어오고 병사들은 굶주린 기색이었습니다.”
 

이방언 장군의 묘소
이방언대접주는 동학 남도전투의 주인공이다. 1894년 음력 12월 15일 석대들 전투에서 패배, 12월 25일 체포돼 나주로 압송됐다. 이후 서울로 압송돼 재판에 회부되었으나 무죄 석방됐다. 그러나 고향으로 돌아온 1895년 4월 27일에 다시 체포돼 장흥 장대에서 처형당했다.

오시(午時·오전 11~오후 1시)경에 기습공격을 받았기 때문에 조일연합군은 점심도 제대로 먹지 못했을 것이다. 전투를 벌려 자울재까지 추격했을 때는 해가 서산에 걸려 있었다고 했으니 약 4시간 이상을 전투를 하였고, 병사들은 굶주린 기색이었다고 했으니 지칠 대로 지쳤다는 것이다.

석대에서 자울재까지는 10리도 되지 않는다. 그러나 교도중대장은 4시간의 사투 끝에 겨우 농민군을 10리도 몰아내지 못했다고 보고하면 그들의 전공(戰功)에 허물이 되기 때문에 20리 되는 자오현(자울재)까지 추격했다고 과장하여 보고를 한 것으로 여겨진다.

교도중대장은 자울재에서 더 이상 농민군을 추격하지 못하고 회군 할 때의 묘사를 다음과 같이 하고 있다.

“남쪽을 바라보니 깊은 계곡이 구불구불 이어져있고, 대숲이 빼곡히 들어서 있어 잘못될 염려가 있을 듯하여 즉시 본 진영으로 회군하였습니다”

자울재 아래 용산면 어산 방향으로 이어지는 길이 좁고 구불구불하여 전후가 잘 살펴지지 않은 것을 우려한 것이다. 석대혈전에서 농민군에게 큰 타격을 입힌 대숲의 매복 공격을 이번에는 자신들이 당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회군을 한 것이다.

조일연합군의 자울재에서 회군은 장흥농민군에게 다시 한 번 부대를 수습할 기회를 만들어 주어 다음의 옥산촌 전투를 갖게 만든다. /최혁 기자 kjhyuckchoi@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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