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천~4천명 농민군 고읍천 사이에 두고 日軍과 4시간 혈전

(50)장흥 옥산촌 전투

3천~4천명 농민군 고읍천 사이에 두고 日軍과 4시간 혈전

김학삼·이인환 지휘부대 고읍에서 버티다 옥산촌, 금성당 기슭까지 밀려

일군 250명·관군 180명 농민군 쫓아 방촌까지 추격했으나 밤 깊자 철수

옥산촌 주민들 총소리에 놀라 뒷산 피신하다 日軍 무차별 사격에 희생 커
 

장흥 관산
동학농민군과 조일연합군의 전투가 벌어졌던 관산. 관산은 1894년 음력 11월 25일 대흥(大興:현 관산읍) 대접주 이인환(李仁煥)이 농민군을 이끌고 봉기한 곳이다. 석대들 전투에서 패한 농민군은 12월 17일 이곳에 재집결해 최후의 일전을 준비했다. 1970년대 관산모습.

■표영삼 선생의 옥산촌 전투에 관한 글

재기 불능에 빠진 이인환·김삼묵·윤세현(尹世顯) 등 대흥·관산, 그리고 강진의 칠량, 대구 접주들은 장흥에서 남쪽 40리 지점인 고읍 대내장(竹川場, 玉山)으로 후퇴하여 다시 전열을 가다듬었다. 이들은

장흥 옥산
농민군은 고읍천 앞으로 나가 진을 치고 조일연합군과 전투를 벌였다. 농민군은 일본군이 고읍천을 넘어오지 못하도록 대포 등을 쏘며 저항했으나 화력에 밀려 옥산촌까지 후퇴했다. 농민군은 천관산 기슭인 금성당(金城堂) 능선을 요새로 잡아 최후의 전투를 벌였으나 결국 패하고 말았다. 1970년대 옥산촌 모습. /장흥동학농민혁명기념관 제공

엄동설한에도 불구하고 4천∼5천을 모아 최후의 결전을 벌이기로 하였다. 일본군과 경군은 17일 오후에 나타났으며 대내장에서 최후의 결전을 벌이게 되었다. (위 순무선봉진등록의 교도중대장 보고내용 생략) 관산읍에 사는 손동옥(孫東玉)의 증언에 따르면 “동학군과 일본군은 고읍천(古邑川)을 사이에 두고 3∼4시간 싸우다가 동학군이 패했다. 총소리에 놀란 옥산 주민들은 뒷산으로 피신하여 온 산이 백산이 되었다. 일본군은 이들에게 총격을 퍼부어 무고한 주민들이 많이 사살되었다”고 하였다.
 

동학농민혁명 지도자 부조(浮彫)
장흥동학농민혁명 기념관 내부에 설치돼 있는 동학농민혁명 지도자 모습들.
김학삼 접주

■위의환 선생의 옥산촌 전투에 대한 견해

위의환씨는 옥산촌 전투가 (1984년 음력)12월 17일 아니라 12월 16일에 벌어졌다고 보고 있다. 그는 조일연합군이 14일 석대들 전투를 마치고 다음날 15일 농민군으로부터 기습을 당하자 바로 농민군 소탕에 나섰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일본군과 관군으로 이뤄진 조일연합군은 14일 석대들에서 농민군을 맞아 치열한 싸움을 벌였다. 그러나 농민군과의 전투에서 대승을 거둔 뒤 안심하고 있다가 기습을 당한다.

조일연합군은 잔당토벌을 미루고 있다가 15일 오전에 휴식을 취하는 도중 오시(午時: 오전 11~오후 1시)에 기습을 당하자 곧바로 잔당토벌에 나선 것이다. 조일연합군은 고읍면에 농민군이 모여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자 휴식을 취하지 않고 16일 곧바로 공격에 나선 것으로 여겨진다.

조일연합군은 자울재~남면을 거쳐 솔치재에서 정황을 파악한 뒤 대내장(竹川場: 죽청이 아니라 현재 죽교(竹橋)라고 부르는 부근)의 하천을 사이에 두고 옥산촌에 진을 치고 있는 농민군과 대치했다. 그 뒤 죽교를 넘어 옥산촌으로 진격해 전투를 벌인 것 같다.

이 옥산촌 전투에서 농민군은 대단히 격렬하게 저항했다. 조일연합군은 농민군을 단숨에 격퇴시키지 못하고 밤이 가까울 때까지 전투를 했다고 전해진다. 따라서 최소한 4~5시간의 전투가 벌어졌을 것으로 보인다.
 

이인환 접주./조연희 화백 제공

특히 표영삼 선생이 채록한 관산읍에 사는 손동옥(孫東玉)의 증언에 따르면 “동학군과 일본군은 고읍천(古邑川)을 사이에 두고 3∼4시간 싸우다가 동학군이 패했다. 총소리에 놀란 옥산 주민들은 뒷산으로 피신하여 온 산이 백산이 되었다. 일본군은 이들에게 총격을 퍼부어 무고한 주민들이 많이 사살되었다”는 내용은 옥산촌 전투의 전개양상을 추정할 수 있게 해준다.

우선 농민군은 매우 공세적으로 조일연합군과 전투를 치른 것으로 추정된다. 즉 농민군은 솔치재를 넘어오는 조일연합군을 발견하자 옥산촌에서 조일연합군을 기다리지 않고 고읍천 앞으로 나가 진을 치고 조일연합군이 고읍천을 넘어오지 못하게 한 것이다.

농민군은 고읍천 앞에서 대포 등을 쏘며 저항하다가 끝내 옥산촌으로 밀린 것으로 보인다. 이후 농민군은 천관산 기슭인 금성당(金城堂) 능선을 요새로 잡아 최후의 전투를 벌이다 패전한 것 같다.

관군 기록에 보면 조일연합군은 이때 도주하는 농민군을 5리쯤 뒤쫓다가 그때 마침 눈바람이 크게 일어나고 또 황혼으로 밤이 가까워 즉시 회군했다고 나온다.

여기서 농민군이 도주한 방향은 강진군 칠량면으로 넘어가는 방향과 방촌으로 넘어가는 두 방향이다. 농민군은 천산관 등 사방으로 도주했을 것인데, 일본군과 관군이 농민군을 쫓아 5리쯤 진격한 곳은 아마도 방촌 방향이었을 것이다.

그 이유는 옥산촌 전투를 이끈 사람은 이인환으로 그의 휘하에 있는 대흥면의 농민군은 대부분 방촌 출신이었다. 따라서 많은 농민군이 방촌 방향으로 달아났을 것이고 일본군도 방촌방향으로 추격전을 벌였을 가능성이 크다.

옥산촌 전투를 벌인 부대는 장흥전투에서 가장 많은 공훈을 세운 송목정보(松木正保)의 1중대가 아니다. 삼미아일(森尾雅一)이 지휘하는 2중대와 교도중대장 이진호 병력의 우측지대와 백목성태랑(白木誠太郞)이 지휘하는 대대본부 소속부대와 그를 수행한 교도중대 병력이다.

옥산촌 전투에 참여한 조일연합군은 대략 430명이다. 일본군 250(2중대 150명, 대대본부 소속 100명)여명과 교도중대 180(중대장 인솔 150명, 白木을 수행한 부대 30명)여명이다.

조일연합군과 12월 16일 옥산촌에서 전투를 벌인 주력부대는 고읍접주 김학삼(金學三)과 대흥대접주 이인환(李仁煥)이 지휘하는 부대다. 김학삼(金學三)은 이방언 장군과는 내종 당숙질 사이다.

김학삼은 1852년 출생했다. 본관은 김해 김씨 공간공파(恭簡公派)로 족보명은 상휴(相休), 字는 학삼(學三), 號는 모성당(慕聖堂)이다. 옥산전투에서 패배한 뒤 처가인 방촌에 피신해 있다가 체포돼 12월 26일 장흥 벽사역에서 43세의 나이로 처형당했다. /kjhyuckchoi@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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