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당 재기 막기 위해 되도록 많이 죽여라”

<남도일보 최혁 주필의 남도동학 유적지>

(52)일본군과 관군의 동학농민군 토벌

“동학당 재기 막기 위해 되도록 많이 죽여라”

일본공사와 이등(伊藤)사령관 명령 따라 일본군 잔인한 학살

장흥집결 농민군 뿌리 뽑기 위해 조일연합군 32일간 장흥주둔

장흥·보성·강진 세 방향 농민군 소탕…친일파 이두황 악명 떨쳐
 

제물포에 속속 도착하는 일본군 주력부대
1894년 9월 12일, 야마가타(山縣) 추밀원 의장의 지휘로 제물포에 상륙한 제1군 사령부 및 제3사단 주력과 후속 부대. 일본군은 청군을 물리친 뒤 동학군 소탕에 나섰다.

갑오년의 동학농민군들은 1894년 음력 12월 14~15일 석대혈전과 16~17일의 고읍면 옥산촌 전투, 대흥면 월정 전투를 끝으로 사실상 괴멸됐다. 탐관오리들의 학정을 끝내고, 이 땅위의 외세들을 몰아내 새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 분연히 일어섰던 갑오년의 동학농민군들은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이 산하의 꽃잎이 되어 스러져 갔다.
 

제물포 앞바다의 일본군 혼성여단 선발대
1894년 6월 13일, 인천 제물포에 도착한 와카노우라 마루(和歌浦丸)와 일본 혼성여단 선발 대대. 일본은 동학란 진압을 구실삼아 조선에 군대를 파견했다. 청나라도 전날 아산에 청군(淸軍)을 상륙시켰다.

장흥지역 전투에서 패한 농민군은 뿔뿔이 흩어져 무리지어 혹은 개인별로 살길을 찾아 나섰다. 석대들에 모였던 농민군은 전남·북 연합농민군이었다. 장흥의 이방언·이인환·구교철 농민군이 주력부대였다. 이 부대에 전봉준 장군 휘하에 있던 전북지역 김방서 농민군, 무안 배상옥 농민군, 화순 김수근 농민군, 능주 조종순 농민군, 영광 농민군, 순천 농민군 등이 합세했었다.

전투에서 패한 농민군들은 크게 보성, 화순, 강진 등 세 방향으로 도주했다. 일본군과 관군은 농민군들이 도주하는 길목을 지키며 살육 작전을 전개했다. 지난 회에서 언급한 것처럼 덕도 등 서남해안 섬으로 숨은 농민군도 있었다. 일본군은 2척의 군함을 서남해안 일대에 정박시키고 섬으로 들어가는 농민군들을 사살토록 했다.

보성 쪽에서는 관군이 농민군 토벌을 시작했다. 일본군 부산수비대와 좌수영군이 조성 쪽에서 올라오며 농민군들을 사살했다. 이 두 부대는 12월 16일부터 24일까지 보성읍에 주둔하면서 보성일대와 장흥경계를 토벌했다. 일본 후비보병 1중대 본부는 장흥·능주 경계를 지키고 있었다. 화순과 능주로 돌아가려는 농민군의 퇴로를 차단하기 위해서였다. 일본군은 장평~능주~화순읍 방향으로 도주하는 농민군을 처참하게 학살했다.

일본군 2중대와 교도중대는 옥산촌 전투와 월정 전투 이후 도망가는 동학군들을 쫓아 강진으로 진격하면서 농민군들을 소탕했다. 조일연합군은 12월 18일 강진의 남쪽 일대에서 농민군을 토벌한 뒤 해남으로 도주한 농민군을 쫓아 해남으로 진격한다. 해남에서 농민군들을 수색, 소탕한 부대는 일본군 2,3중대이다. 좌선봉장 이규태도 18일~19일 맹포(孟浦)를 거쳐 20일에 해남으로 입성한다.

능주를 지키고 있던 일본군 1중대 역시 토벌의 임무가 달성되자 나주 동창(20일)~영암(21일)을 거쳐 22일 해남 별진역(別辰驛)에 도착한다. 강진에서는 2중대와 3중대가 20일 해남으로 빠져 나가자 장흥에 있던 백목성태랑(白木誠太郞)의 부대가 22일 강진에 들어와 농민군 토벌임무를 계속 수행한다.

강진에는 23일 다시 일본군 3중대가 들어와 다음해(을미년) 음력 1월 8일까지 강진지역의 농민군을 토벌한다. 일본군이 장흥에서 강진과 해남으로 작전범위를 넓혀 농민군 소탕에 나설 수 있었던 것은 12월 20일 이두황 부대가 장흥으로 들어왔기 때문이다.

이두황 부대는 군사가 540명이나 되는 대부대였다. 이두황 부대는 다음해 정월 8일까지 장흥읍에 머물면서 장평~능주 일대와 유치~동창 일대를 오가며 농민군들을 색출, 토벌했다. 이두황은 남소사랑(南小四郞)으로부터 “장흥에 계속 머물며 부근지역의 동학 잔당을 체포하여 죽일 것”이란 명령을 받고 19일 동안이나 장흥에 머물려 잔혹한 소탕전을 전개한다.

이두황 부대가 19일 동안 장흥에 머물었다는 것은 그만큼 잔인한 소탕전이 실시됐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두황은 일본군 지휘자들의 신임을 얻기 위해 그 누구보다도 악랄하게 동학농민군들을 처형했었기 때문이다. 일본군은 전투에서 승리한 뒤 동학군 색출과 처형, 잔당 소탕은 조선관군에게 시켰다. 조선인들로부터 원망을 받지 않고, 민심을 얻기 위한 조치였다.

장흥지역의 토벌은 그 어느 곳보다 거칠고 살벌했다. 장흥지역에 일본군과 조선관군이 주둔한 기간은 모두 32일이다. 32일 동안 조일연합군이 장흥에 머물면서 동학농민군의 씨를 말린 것은 의도적이었다. 일본군 수뇌부는 ‘장흥지역의 동학농민세가 유독 강한 곳이어서 뿌리를 뽑아야 후환이 없겠다’는 생각을 지니고 있었다.

남소사랑(南小四郞)은 <동학당정토약기>에 “장흥·강진 부근 전투 이후로는 많은 비도를 죽이는 방침을 취하였다. 필경 이는 소관 한 사람만의 생각으로 한 것이 아니라, 훗날에 재기할 가능성을 제거하기 위해 다소 살벌하다는 느낌을 살지라도, 그렇게 하라는 정상형(井上馨) 일본공사와 이등(伊藤)사령관의 명령이 있었기 때문이다”라고 적고 있다.
 

친일파 이두황

민족을 팔아 호사를 누린 이두황(李斗璜)

이두황(李斗璜:1858~1916)은 동학농민군을 진압하고 처형하는데 앞장선 조선말 군인이다. 동학농민군을 상대로 한 각종 전투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 이두황은 일본세력을 추종해 입신의 발판으로 삼는다. 그는 김개남(金開南)의 동학군 부대를 목천 세성산에서 격파했다. 이두황은 우금치전투에서 패해 퇴각하는 농민군을 무참하게 학살하는데도 앞장섰다.

그는 도망가는 동학농민군을 끝까지 추격해 살육했다. 전주에 재집결한 동학군을 괴멸시키고 전주를 탈환하기도 했다. 이두황은 석대들 전투가 끝난 1894년 음력 12월 20일 450여명의 우선봉군을 이끌고 장흥읍으로 들어온다. 이두황은 다음해 1월 8일까지 19일간 장흥읍에 주둔하면서 잔인하게 농민군들을 살육했다.

일본군이 훈련시킨 제1대대장이었던 이두황은 다음해 명성황후 시해에 가담했다. 체포령이 내려지자 아들과 함께 일본으로 망명했다. 일본인들의 배려로 10여년 동안의 망명생활은 비교적 풍요로웠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두황은 1907년 특사를 받아 귀국, 이토(伊藤博文)의 배려로 중추원부찬의(中樞院副贊議)가 됐다. 이후 전라북도의 관찰사 겸 재판소판사로 임명받아 호남지역 의병 진압에 몰두했다.
 

전주 기린산에 있는 이두황의 묘
이두황의 묘비 비석

1910년 이후에도 전라북도장관(고등관 3등) 재임명돼 죽을 때까지 호사를 누렸다. 이두황의 장례는 일본 불교식으로 치러졌으며 화장됐다. 후일 그의 묘는 전주 기린산에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그의 묘는 2m가 넘는 묘비 등으로 치장돼 있었으나 비문에 있던 후손이나 친일 관련자들의 이름이 모두 지워져있는 상태였다.

/최혁 기자 kjhyuckchoi@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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