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 장흥 수성군의 동학농민군 토벌과 장흥 사족의 입장 >
<최혁 남도일보 주필의 남도동학 유적지>
이두황 부대 19일간 장흥 머물며 농민군 잔혹하게 소탕

사족이 농민군 색출 소극적이자 이두황 민병 동원해 강경토벌

장흥에는 이방언, 이사경 등 사족출신 동학농민군 지도자 많아

혈연·혼인관계로 대부분 중립유지…관군 민가약탈 비난하기도
 

장흥 수성군의 중심지였던 장흥 향교
1894년 음력 7월에 장흥부사로 부임한 박헌양(朴憲陽)은 이곳 향교(鄕校)에 분향하고 유림들과 함께 강력한 동학 탄압책을 실시했다. 향교 앞 공덕비군에 이용태의 ‘흥학애사비(興學愛士碑)’가 남아 있다.

1894년 음력 12월 20일 양호우선봉장(兩湖右先鋒將)자격으로 540명의 군졸을 이끌고 장흥으로 들어온 이두황은 동학농민군의 장흥부 함락 때(12월 5일) 살아남은 관리(이교:吏校)들을 중심으로 수성군(守城軍)을 구성했다. 이두황은 12월 23일에는 송신묵을 수성좌령(守成左領)에, 김인섭(金寅燮)을 수성우령(守成右領)으로 임명했다.
 

벽사역터
벽사역이 있었던 원도리 1구. 석대들 전투 이후에 많은 농민군들이 이곳으로 끌려와 처형당했다.

또 12월 24일에는 엄찬교(嚴瓚敎)를 장흥 수성중령(守成中領)으로 앉히고 수성군 지휘체계를 완비했다. 그 뒤에는 민병을 모아 장흥부의 수성군을 꾸렸다. 각 면에는 집강(執綱:오늘날의 면장)과 통수(統首)를 중심으로 방수장(防守將)을 뽑도록 했다. 민병들을 중심으로 해 장흥부의 수성군이 만들어진 것이다.
 

벽사역 터
벽사역이 있었던 축내리. 석대들 전투 이후에 많은 농민군들이 이곳으로 끌려와 처형당했다.

상당수 장흥의 유림들은 동학농민군의 결성과 집강소 운영 등을 반역(反逆)으로 간주했다. 그래서 유생들은 박헌양 부사가 부임한 뒤 농민군에 대항하기 위한 방안을 논의하는 등 적극적으로 움직였다. 장흥 유생들이 농민군 탄압에 앞장선 내용은 <박후의적>과 <영회단>등에 기록돼 있다.

그러나 일부를 제외하고 장흥지역 대부분 사족(士族)들은 농민군 색출과 토벌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다. 가장 큰 이유는 장흥지역에서 가장 영향력이 컸던 이방언 접주를 비롯, 상당수 동학농민군 지도자가 사족출신이고 이들이 다른 유력문중과 혈연관계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두황은 집강들이 동학도 소탕에 소극적으로 나서자 민병들을 중심으로 해 농민군 색출 및 처형에 나선다.

장흥의 향토사학자 위의환씨는 장흥지역 상당수 사족들이 동학농민군들에게 군량미를 대주거나 관군과 농민군 사이에서 중립을 지키고 관군이 민가를 약탈하는 것에 대해 탄핵 상소장을 올렸던 것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첫째, 이방언 장군의 교우와 친분관계가 상당히 작용했다. 그와 교류관계가 있는 장흥 고씨와 장흥 위씨 쪽에서는 군량미를 대주고, 대장기에 휘호를 써준 것이 사실이다.

둘째, 장흥동학은 다른 지역과 달리 지도부가 당시 장흥에서는 선비 층으로 분류되는 재지사족 집단이었다. 동학의 지도부와 친분관계가 있는 다른 재지사족이 동학을 탄압하는데 나설 수 없었다.

셋째, 동학지부도와 재지사족, 재지사족과 재지사족 간에는 서로 복잡한 절인(切姻)관계가 구성돼 있었다. 곧 재지사족인 인천 이씨, 장흥 위씨, 수원 백씨, 김해 김씨 공간공파(恭簡公派) 간에는 서로 복잡한 혼인관계가 얽혀 있었다.

김학삼은 위문(魏門)을 처가로 하고, 이사경의 부친은 위문(魏門)을 외가로 하며, 이방언 장군 집안도 위문(魏門)과는 혼인관계에 있었다. 또한 이방언 장군과 김학삼 집안은 서로 친척관계가 된다. 용계면에서 동학에 참여하는 백씨(白氏) 집안도 위문(魏門)과는 혼인관계에 있었던 것이다”

석대들 전투 이후 장흥지역에서 고을의 유림(재지사족)들이 동학농민군 색출이나 처단에 나서지 않은 곳은 당시의 용계면과 회령면, 대흥면 등이다. 다른 지역에서도 집강과 향약의 지도자들이 농민군 토벌을 주저했다. 이에 이두황은 1895년 음력 1월 3일 장흥 각 면 집강에게 아래와 같은 내용의 편지를 보내 농민군 토벌에 나설 것을 촉구한다.

“장흥 각 면 집강 및 민인 너희들은 모두 장흥의 백성이다. 태수(太守)가 모든 성이 함락될 때 이미 죽음의 해를 입은 것을 보았으니 너희들은 스스로 말해 보아라. 장차 법에 의해 죽임을 당함(屠戮之律)을 면하려면 어떻게 말하여야 하겠느냐? 이로써 특별히 ‘옥과 돌이 함께 불타 버림(玉石俱焚: 즉 착한 사람이나 악한 사람이 함께 망함을 당하는 것)’을 생각해보아라.

적도를 적발하면 결박하여 진으로 바쳐서 죄가 없음을 밝히는 뜻으로 삼아라. 명령을 경계하여 조금이라도 동학도를 보았을 때는 진으로 보고하여라. 예를 들어 혹 몇 명을 잡아 바쳐 그럴 듯하게 꾸며 책임을 면하려는 마을은 경계하여라. 혹 하나라도 잡지 못하는 마을은 순순히 타이르니 특별히 경계하라는 뜻이다.

편안히 살려면 명령이 도착한 즉시 산과 계곡 숲과 덤불 등의 사방을 염탐하여 탐색하고 더불어 암혈과 석굴에 은닉해 있는 적도를 일일이 수색 체포해 결박하여 잘못 따위가 없음을 드러내는 단서로 삼아라. 그렇지 않으면 초멸의 우환을 면하지 못할 것임을 충분히 두렵게 생각하여라”

지난 회에 언급한 대로 이두황의 우선봉군은 1894년 음력 12월 20일 장흥에 입성한 후 다음해 1월 8일 나주로 떠났다. 이 기간 동안 우선봉군 관졸들은 각 마을에서 동학도들을 색출해 무자비하게 처형했다. 이두황군의 나주 주둔기간동안 얼마나 많은 농민군들이 처형당했는지에 대한 기록이 없기에 정확한 인명피해는 알 수가 없다.

그러나 수백 명의 농민들이 맞아죽거나 혹은 불태워 죽여진 것으로 보인다. 장흥이 함락될 때 96명의 수성군들이 목숨을 잃었는데 이 때 희생당한 관군 가족들의 원한이 농민군을 잔인하게 토벌한 원인으로 작용했다. 또 벽사역의 역졸들도 역을 태운 분풀이를 모질게 함에 따라 농민군과 가족들의 희생이 컸다. 이두황의 부대는 민가를 약탈해 원성을 샀는데 이 부분은 다음 회에서 거론한다.

 

영회당

갑오동학란<수성장졸순절비>
 

▲ 수성장졸순절비

장녕성을 지키다 박헌양 부사와 함께 목숨을 잃은 수성군은 모두 96명이다. 장녕성 전투에서 목숨을 잃은 이는 모두 400~500명으로 전해진다. 인명피해뿐만 아니라 물적 피해도 컸다. 전투과정에서 성내의 거의 모든 집들이 불에 탄 것으로 알려졌다.
 

장흥서초등학교 건너편의 조그만 골목길로 들어서 200m정도를 올라가면 영회당이 있다. 영회당은 장녕성 전투에서 희생당한 장졸들을 추모하기 위해 나중에 건립된 사당이다. 12월 20일 장흥에 들어온 우선봉장 이두황이 수성장졸들에 대한 포상을 한데 이어 어사 이승욱이 임금에게 주상해 순절단을 1898년 북문 밖에 건립했다.

사당이 건립된 후 수성장졸에 대한 제사는 후손들과 지방관들이 참여하는 영회계에서 주도했다. 영회계는 1899년 송사 기우만에게 수성장졸들의 충절을 기리는 비문을 짓도록 청하고 여돈현이 글씨를 쓰도록 한 뒤 순절단 옆에 갑오동학란수성장졸순절비를 세웠다.

1928년 순절단과 순절비를 현 위치인 장흥읍 예양리 78 현재의 위치로 옮기면서 영회당이 건립됐다고 한다. 후손들은 매년 음력 3월 15일에 96인의 수성장졸들의 영령을 위로하고 충절을 기리는 제례를 올리고 있다.

최혁 기자/kjhyuckchoi@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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