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시리즈

<54회, 양호우선봉장(兩湖右先鋒將) 이두황(李斗璜)의 약탈

이두황, 충청·전라 가는 곳마다 민가약탈 욕심채워

청일전쟁 당시 일본군 통역·정탐으로 활동하며 출세끈 잡아

양호우선봉장 임명뒤 앞장서 잔인하게 동학농민군 토벌·학살

일군 마저도 이두황 등 조선군사 약탈 심각성 조선조정에 항의
 

1905년 장흥읍 사진
지금의 장흥경찰서 일대이다. 장흥은 동학농민군의 위세가 다른 지역보다 월등히 높았던 곳이다. 또 학군의 마지막 저항이 있었던 곳이기에 그만큼 관군과 일본군의 토벌이 심하게 이뤄졌다.

이두황은 1882년(고종 19년) 임오군란 뒤 무과에 급제해 친군좌영초관(親軍左營哨官)이라는 자리에 오른다. 이후 수문장 등의 무관직을 거쳐 1889년 흥해군수를 지냈다. 이두황은 일본군을 이용해 출세가도를 달리기 시작했다. 청일전쟁이 일어나자 그는 일본군 제5사단장 노즈(野津) 중장을 찾아가 자신을 참전시켜 줄 것을 간곡히 요청했다.

이두황은 일단의 조선 군인들을 데리고 청군에 대한 정탐활동을 벌였던 것으로 알려졌다. 통역과 청군병사들의 시체를 매장하는 것도 그의 임무중의 하나였다. 1894년 동학농민들의 2차기포가 일어나자 동학농민군을 토벌하기 위해 순무영(巡撫營)이 설치됐다. 이두황은 순무영 예하의 장위영(壯衛營) 영관(領官)으로 임명돼 농민군 토벌에 뛰어들었다.

그는 9월 10일 죽산부사로 선임돼 장위영 병사를 지휘하면서 경기 일대의 동학농민군들을 토벌했다. 그는 북접(北接)동학군이 제2차 기포에 참가하기 위해 보은장내에 모였을 때 농민군을 기습해 큰 피해를 입혔다. 청주에서는 김개남(金開南)의 동학농민군과 싸워 이겼다. 공주전투에도 참여해 패퇴하는 동학군을 추격하여 해미·유구·노성·논산 등지에서 많은 동학군을 살육했다.

이두황은 청일전쟁과 동학농민군 토벌 과정에서 일본군의 신뢰를 받아 드디어 조선군 부대장이라 할 수 있는 ‘우선봉장’의 자리에 오른다. 당시 일본군과 조선조정은 충청 이남의 동학농민군 토벌을 위해 조선군을 양호좌선봉(兩湖左先鋒), 양호우선봉(兩湖右先鋒) 두 개로 나눴었다.

이두황은 1894년 11월 26일부터 양호우선봉장(兩湖右先鋒將)이 돼 전라도 지역으로 내려와 본격적으로 농민군 토벌에 나선다. 1894년 음력 11월 28일 남원에서 농민군을 격퇴시킨 것을 시작으로 곡성, 구례, 광양, 순천, 낙안, 흥양(고흥), 보성 일대에서 동학농민군과 전투를 벌이고 토벌에 나섰다. 12월 20일부터 다음해 1월 8일까지 장흥에 주둔하면서 농민군 학살을 주도했다.
 

장흥 동헌 터

이두황은 1895년 음력 1월 8일 장흥에서 나주로 떠났다. 1월 15일까지 나주에 머무르면서 이인환 대접주 등 동학농민군 지도부의 처형에 간여했다. 1월 16일 나주를 떠나 광주~전주~청주를 거쳐 2월 4일 일본군 사령부가 있는 서울 용산의 만리창에 도착해 일본군 지도부의 환영을 받았다. 그는 이후로 명성황후 시해 사건에 가담하는 등 일본의 조선강탈에 앞장섰다.

그는 동학농민군을 잔인하게 토벌했을 뿐만 아니라 민가를 약탈해 많은 재물을 모았다. 일본군조차 이두황의 약탈이 너무 심하다며 무엇인가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말할 정도였다. 이두황 부대를 지휘했던 일본군 부대장 남소사랑(南小四郞)은 그가 남긴 <동학당정토기>에서 조선군의 약탈에 대해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지도에 나와있는 장흥 안양면의 해창
이두황은 군량미 확보 명분으로 장흥일대에서 거둬들인 쌀들을 안양면 해창에 쌓아두었다. 이두황은 이 쌀들을 배를 통해 서울로 가져간 것으로 보인다.

“조선군인들(韓兵)이 끼친 폐해에 대해 말하겠다. 교도중대(일본군에 배속된 조선군대)는 병력도 적고 일본사관 2명이 배속돼 엄격히 감독했기 때문에 약탈을 하지 못했다. 그러나 좌·우 양선봉(이규태와 이두황)의 조선군은 가는 곳마다 민가에 들어가 먹을 것과 담배, 버선, 내의, 금전을 약탈했다.

특히 가장 질린 것은 그들이 행군 중 마음대로 대열에서 빠져나가 민가에 들어가 술을 마시고 밥을 먹으면서도, 값도 치르지 않은 채 떠나는 것이었다. 밤이 되면 상관의 허락도 받지 않고 여기저기를 쑤시고 다니며 행패를 부렸다. 마을에 도착하면 제일 먼저 닭을 빼앗아 죽였다. 그들은 이 같은 일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저질렀다”

일본군 소위(少尉) 재등온(齋藤溫)은 이두황이 충청지역에서 저지른 약탈에 대해 조선조정(순무영)에 다음과 같이 알리면서 조선 군인들의 행패를 막아줄 것을 요청했다.

“일본군이 홍주, 태안, 서산 등지에서 동학도 색출에 나섰을 때 동학도들은 이미 흩어지고 없어져 남아 있는 이들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두황(李斗璜)이 인솔한 조선병정이 도착해 민간의 재산을 약탈하기 시작했습니다. 조선군 지휘관들은 병사들의 행패를 금지하지 않았습니다. 당시 현장에서 백성에 해를 끼치는 것을 두 번 보았습니다.
 

장흥동헌 근경
이두황군은 장흥에 23일 동안 머물며 동학군 색출, 처형에 나섰다. 이 기간동안 군량미와 군사를 움직이는데 사용한다며 각 고을 수령으로부터 쌀과 의복, 그릇 등을 받아 챙겨 사욕을 채웠다.

해미(海美)땅으로 민심을 위무하고 집집마다 동학도가 있나 없나를 살피고 조사하러 갔을 때 이두황부대가 약탈하여 빼앗은 소가 50마리나 됩니다. 또 가마솥처럼 무거운 것은 제외하고 의복, 돈, 곡식, 그릇, 쇠로 만든 온갖 그릇 등을 탈취해 갔습니다. 빼앗은 소에 그것들을 싣고 갔습니다.
 

친일파 이두황

양민들은 돈과 곡식을 동학도에 빼앗기고 난 뒤 얼마 되지 않은 것 마저 또 경군한테 빼앗겼습니다. 조금이라도 귀한 것은 모두 빼앗겨 남은 것이 없었습니다. 백성들은 추위와 굶주림으로 인해 불쌍하기 짝이 없습니다. 백성들은 눈물로써 억울함을 호소했습니다. 홍주(洪州) 목사도 조선군인들의 약탈에 대해 심히 분통해 했습니다” (위의환 선생 한문 번역)

/최혁 기자 kjhyuckchoi@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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