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동주’와 창씨개명

영화 ‘동주’와 창씨개명

<김세곤 호남역사연구원장>

영화 ‘동주’를 보았다. 가장 인상 깊은 장면은 윤동주(1917∼1945)와 정지용(1902∼1950)의 만남이었다. 윤동주는 창씨개명(創氏改名)까지 하면서 일본 유학을 가야 하는 지를 정지용에게 토로했다. 동주로서는 부끄러운 일이었다. 정지용의 답변이 명언이다. “윤시인, 부끄러움을 아는 건 부끄러움이 아니야. 부끄러운 것을 모르는 놈들이 더 부끄러운 거지.” 창씨개명! 1938년에 조선총독부는 조선어 사용을 금지시켰다. 1939년 9월에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10월에 ‘국민징용령’을 내렸고, 12월에는 ‘창씨개명령’을 공포했다.

일제는 1940년 2월11일부터 창씨개명 접수를 받기 시작했고, 8월11일까지 창씨개명 완료를 요구했다. 접수 이틀 만에 87건이 접수되었다. 여기에는 이광수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는 가야마 미쓰로(香山光郞)로 개명하였다. 이광수는 2월 20일자 매일신보에 ‘창씨와 나’를 기고하였다. 이 글에서 그는 “나는 천황의 신민이다. 내 자손도 천황의 신민으로 살 것이다. 이광수라는 씨명으로도 천황의 신민이 못될 것은 아니나, 가야마 미쓰로가 조금 더 천황의 신민답다고 나는 믿는다”라고 하였다. 이러자 1천여 통의 비난 편지가 이광수 집에 빗발쳤다.

‘문인투서사건’도 일어났다. 이 사건은 이광수의 부인 허영숙이 경기도 경찰부에 고발하여 알려졌는데, 광화문 우편국 관내에 사는 정지용, 최영수, 계용묵, 정비석 4명이 혐의를 받아 각각 1주일과 1개월에 이르기까지 구류되어 문초를 당했다.

창씨개명은 정말 똥 같은 짓이었다. 연희전문학교 교장 윤치호는 ‘이동치호(伊東致昊, 이토 치카우)로 창씨 개명하였는데 연전과 이화여전 학생들은 ‘이 똥 치워’라는 발음으로 윤치호를 조롱하였다. (강준만, 한국근대사 산책 10권, p14)

이런 조롱은 일찍이 서재필과 함께 독립협회를 주도하였고 미국에서 개신교로 개종하고, 애국가 작사가로 알려진 개화파 윤치호가 친일에 앞장선 것에 대한 분노 표출이었다.

1940년 5월까지 창씨개명은 7.6%에 불과했다. 이러자 조선총독부는 행정력과 경찰력을 총동원해 창씨개명을 하도록 협박·강요하였다. 즉 창씨를 하지 않은 사람의 자녀에 대해서는 각급 학교의 입학을 거부하는 등 여러 가지 불이익을 줌으로써 창씨율을 79.3%로 끌어올렸다.

한편, 창씨개명을 안한 이도 상당수 있었다. 동아일보 사장 송진우도 그 중 한 명이었다. 1940년 8월 10일에 동아일보가 폐간되자 송진우는 두문불출하였고 창씨개명을 끝내 거부했다.

1941년 12월 27일에 윤동주는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하였다. 졸업을 앞둔 11월 20일에 윤동주는 ‘서시(序詩)’를 썼다.

죽는 날 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후략)

그는 졸업 기념으로 자선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를 77부 한정판으로 출간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1942년 1월 29일에 윤동주는 도일(渡日)을 위해 연희전문학교에 히라누마 도쥬(平沼東柱)로 창씨개명계를 제출했다.

창씨개명계 제출 5일전인 1월 24일에 윤동주는 ‘참회록’시를 썼다.

파란 녹이 낀 구리 거울 속에

내 얼굴이 남아 있는 것은

어느 왕조의 유물이기에

이다지도 욕될까.

나는 나의 참회의 글을 한 줄에 줄이자.

만이십사년 일개월을

무슨 기쁨을 바라 살아왔던가.

내일이나 모레나 그 어느 즐거운 날에

나는 또 한 줄의 참회록을 써야 한다.

그 때 그 젊은 나이에

왜 그런 부끄런 고백을 했던가. (후략)

한편, 윤동주는 정지용을 만난 적이 없다. 영화 ‘동주’에서의 동주와 지용의 만남은 허구이다. 1946년 10월에 정지용은 경향신문사 주간(主幹)이었는데, 이 때 윤동주의 친구 강처중은 경향신문 기자였다.

1948년 1월에 윤동주의 유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가 발간되었다. 정지용이 서문을, 강처중이 발문을 썼다.

무시무시한 고독에서 죽었고나! 29세가 되도록 시도 발표하여 본 적도 없이! (정지용의 서문에서)

불러도 대답 없을 동주 몽규었만 헛되나마 다시 부르고 싶은 동주! 몽규! (강처중의 발문에서)

‘동주’가 100만 관객을 돌파하였다. ‘동주’를 보면서 일제강점기 민족 말살을 기억한다. 영화 ‘귀향’을 보면서 일제의 성노예 만행에 분노하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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