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영 군사들 곳곳 돌아다니며 농민군 처형·민가 약탈

최혁 남도일보 주필의 남도동학유적지

(56, 병영성 군사들의 동학농민군 살육과 약탈)

병영 군사들 곳곳 돌아다니며 농민군 처형·민가 약탈

동학도 있는 마을 불지르며 만행…억울한 죽음도 많아

강진·병영성 함락 때 가족 잃은 민병도 농민학살 가담

日本軍 후환 없애려 동학도 말살 방침 정하고 배후조종
 

병영성 내부 모습

1894년 음력 12월 석대들·월정 전투를 끝으로 갑오농민혁명의 불꽃은 사그라졌다. 장흥을 중심으로 한 남도 땅에는 다시 피바람이 몰아쳤다. 1년여 동안 동학농민군의 위세에 숨죽이고 있었던 관군과 유생, 그리고 민병들이 ‘동학잔당’ 소탕에 나섰다.

특히 동학농민군이 함락시키는 과정에서 인명·재산피해가 컸던 장흥·강진지역에서는 농민군과 가족, 그 마을주민들이 복수의 정도가 심했다. 일본군과 관군이 남긴 토벌기록과 그리고 동학농민군들에 부정적이었던 유생들이 남긴 각종 기록에는 동도(東徒:동학농민군)들에 대한 잔인한 체포·처형내용이 자세히 담겨있다.

지난 회에서는 장흥부와 벽사역 군졸·역졸들의 동학농민군 체포와 민가 약탈에 대해서 밝혔다. 벽사역 찰방 김일원과 그 수하 역졸들은 종 3품인 이교석(李敎奭)이 장흥부사로 오기까지 4개월 여 동안 마음 놓고 장흥과 보성 일대를 넘나들며 무자비한 처형과 약탈을 자행했다.
 

병영성 외부의 모습
1894년 동학농민군이 병영성을 점령할 때 병영성 관아건물과 민가 대부분은 불에 타버렸다. 1895년 병영성이 없어지자 상당수 병사들은 상인이 돼 생계를 꾸렸다. 병영상인이 생겨나게 된 배경이다. 병영성은 현재 복원공사가 진행 중이다. /남성진 기자 nam@namdonews.com

이번 회에서 밝힐 병영성 군졸들의 만행은 장흥 군졸들보다 훨씬 더 참혹하고 그 범위가 광범위하다. 병영성 군졸들은 전남지역 전체를 관할하고 있었기에 강진, 해남, 장흥, 흥양(고흥), 보성, 능주 등 곳곳을 돌아다니며 동도들을 처형했다. 또 동학도들을 색출하는 과정에서 동학이 성행했던 마을을 쑥밭으로 만들어버렸다.
 

먼곳에서 바라본 강진 병영성
장흥 석대들 전투이후 농민군 세력이 완전히 꺾이자 병영성 군졸들은 남도땅 전역에서 농민군 색출작업을 벌여 그들을 무자비하게 처형했다. 농민군이 함락하는 과정에서 많은 피해를 입었던 병영성 군사와 민병은 분풀이를 동학도 가족과 마을주민들에게 했다. 마을을 불지르고 조금이라도 수상하면 농민들을 마구잡이로 죽였다. /남성진 기자 nam@namdonews.com

장흥과 강진지역은 동학농민군이 벽사역과 장녕성(장흥성), 강진성과 병영성을 함락하는 과정에서 관군과 민병의 피해가 컸던 곳이다. 따라서 죽거나 크게 다친 관군의 가족과 민병 측에 가담했던 백성들은 동학도들에 대한 원한이 깊었다. 그래서 더욱 잔인하고 주도면밀하게 동학도들을 찾아내 도륙을 했다.

이 같은 동학도 말살은 일본군의 의중에 따른 것이었다. 일본군은 외형적으로는 동학농민군과의 대규모 전투에만 참여하고 동학도 색출과 처형은 조선관군이 하도록 했다. 일본군이 앞장서 조선인들을 처형하면 조선인들의 반일감정이 커질 것을 우려한 것이다.
 

1905년 전후의 강진군수 사진
이 사진은 강진군수라는 기록만 있을뿐 다른 기록이 없다. 장흥 사학자 양기수씨는 이 사진이 장흥군수 이장용(李章鎔, 1905∼1907)과 장흥의 다른 사진들이 함께 발견된 점을 들어 장흥군수를 지내고 강진군수로 부임한 강영서(姜永瑞 )군수로 추정하고 있다. /양기수씨 제공

그러나 조선 조정 내 친일파(김홍집의 개화파 내각)와 우선봉장 이두황 등에게는 동학도들을 뿌리도 남김없이 모두 처형할 것을 은밀하게 지시한 것으로 보인다. 이 같은 사실은 <주한일본공사관기록> 6권 26~59쪽에 실려 있는 <동학당 정토약기(東學黨征討略記)>를 살펴보면 잘 알 수 있다.

동학당 정토약기는 일본군의 동학군 토벌 야전사령관인 후비보병 19대대 대대장인 남소사랑(南小四郞)이 토벌을 마친 후 5월 어느 날 일본 공사관 관리의 입회하에 총리대신(김홍집)을 비롯한 조선정부의 관리들에게 토벌의 전 과정의 전후 사정을 밝힌 것을 문서로 정리해 놓은 것이다. 장흥전투 이후 동학도들을 다수 처형한 배경에 대해 남소사랑은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장흥·강진 부근 전투 이후로는 많은 비도를 죽이는 방침을 취하였다. 필경 이는 소관 한 사람만의 생각으로 한 것이 아니라, 훗날에 재기할 가능성을 제거하기 위해 다소 살벌하다는 느낌을 살지라도, 그렇게 하라는 공사와 사령관의 명령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전봉준이 동학도 안에서 떠나지 않고 있었을 때는 그래도 동학도 중에 다소의 양민(良民)과 의사(義士)를 찾아 볼 수 있었으나, 봉준이 일단 그 속에서 떠나자 이들 양민·의사들은 역시 모두 흩어져 떠나갔다. 그렇기 때문에 남은 무리들은 한결 같이 모두 잔학하고 영악한 무뢰한이 됐다.

그래서 또한 많이 죽이는 방책이 필요하게 되었던 것이다. 장흥 근처에서는 인민을 협박하여 모두 동학도에 가담시켰기 때문에 그 수가 실로 수백 명에 달하였다. 그래서 진짜 동학당이 잡히는 대로 이를 죽여 버렸다”(위의환 선생 번역)

강진 유생 박기현의 <일사>에는 병영성 군졸과 민병들의 동학농민군 연루자들에 대한 처형이 다음과 같이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다.

“(1894년 음력) 12월 15일: 병영성 사람들이 격분하여 병영에서 동학하던 사람들을 타살했다. 또 함께 (장흥 안양) 월암, 신촌 등지로 가서 동학마을을 불사르고 가산을 몰수했다. 이때 (동학농민군이 병영성을 공격하는 와중에 집들이 모두 불 태워져 버렸기 때문에) 영중(병영성)사람 가운데 집이 없는 자들이 열에 여덟아홉이나 됐다. 혹은 아버지가 죽고, 혹은 형이 죽고, 혹은 동생을 잃고, 혹은 자식을 잃은 사람들이 분노하여 일제히 세력을 일으키니 제지하기가 대단히 어려웠다.

날마다 동학 마을에 가서 가산을 몰수하고 사람을 만나면 잡아와 타살하니, 그 가운데 동학을 범하지 않은 사람으로 영중에 아는 사람이 있는 자는 다행히 죽음을 면하였다. 그러나 죄 없이 억울하게 죽은 사람도 있으니 탄식하지 않을 수 없다”

/최혁 기자 kjhyuckchoi@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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