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략과 용맹이 뛰어났던 남도의 걸출한 동학지도자

최혁 남도일보 주필의 동학유적지-(57,남도 전투와 이방언 장군<상>)

지략과 용맹이 뛰어났던 남도의 걸출한 동학지도자

전봉준 주력부대 붕괴 뒤에도 농민군 이끌고 최후의 항쟁

회령진·벽사역·장녕성·강진읍성·병영성 차례로 함락시켜

남도 땅 최고 동학지도자로 평가…‘남도장군’으로 불리기도
 

장흥 용산 도르뫼 들판
이방언 대접주 휘하의 농민군은 도르뫼 들판에서 군사훈련을 받으며 관군과의 전투에 대비했다. 70년대 도르뫼 들판의 모습. /장흥동학농민혁명기념관 제공

이방언(李芳彦) 대접주는 구한말 나라와 민족을 구하기 위해 온몸을 바쳐 투쟁했던 걸출한 인물이었다. 동학농민혁명사에 있어서 이방언 대접주는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전봉준 장군과 함께 전라도 농민들의 의로운 마음을 모아 관군과 일제의 진압에 맞서 수많은 크고 작은 전투를 치렀다.

이방언 대접주는 장흥지역의 이인환, 이사경, 구교철 등과 함께 장흥과 강진 일대의 전투를 주도했다. 전봉준 장군 휘하에서 전투를 치른 탓에 무안의 배상옥, 순천의 김인배, 손화중, 최경선 등 전라지역 주요 동학군 지도자들과도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방언 장군은 전남지역의 주요전투를 이끌어 ‘남도동학의 주역’으로 평가받고 있다.
 

동학농민혁명 최후의 전투가 벌어진 석대들
이방언 대접주를 중심으로 한 동학농민군 3만여명은 장흥 석대들에서 관군, 일본군과 최후의 일전을 벌인다. 이 전투에서 농민군은 일본군의 신식무기와 매복, 기습 작전에 걸려 패배한다. 석대들 전투를 끝으로 갑오년 농민항쟁은 사실상 막이 내린다. 70년대 석대들 모습. /장흥동학농민혁명기념관 제공

장흥의 사학자 위의환씨는 전주성·우금치 전투와 별개로 전남지역에서 벌어졌던 동학농민군의 봉기와 전투, 그리고 패배를 총망라해 ‘남도전투’라 명칭하고 있다. 그리고 이방언 대접주가 그 ‘남도전투’의 중심에 서 있다고 강조하고 있다. 이방언 대접주는 지략을 갖춘 용장이었다. 장성 황룡강 전투에서는 농민군이 장태를 이용, 일본군의 사격을 피하도록 해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1894년 음력 9월 12~13일 삼례에서 동학의 남·북접이 모여 회의를 한 뒤 동학농민군은 2차 기포를 한다. 동학농민군은 한양을 공격하기 위해 북상하다가 공주 우금치 전투에서 크게 패해 세력이 꺾이게 된다. 이때 이방언 대접주는 장흥농민군을 이끌고 우금치 전투에 참여한 것으로 보인다.
 

석대들 전투 중인 이방언 장군 상상도.
이방언대접주가 농민군을 이끌고 전투를 벌이고 있다. /조연희 화백 작품

이방언 대접주를 따라 북진했던 장흥 농민군은 장흥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이때 이방언 장군은 수많은 외지의 농민군을 대동하고 와서 12월 1일 장평면 사창(司倉)에서 이인환, 구교철 등이 이끈 장흥 현지 출정기포 세력과 합류한다.

그러나 외부상황은 장흥에 집결한 농민군들에게 불리하게 돌아갔다. 12월 2일 전봉준 장군이 체포되면서 전라도 지역의 동학농민군은 사실상 와해된다. 그나마 병력을 갖고 있던 최경선과 손화중도 광주에서 군대를 해산한 뒤 몸을 숨긴다. 12월 1일 이후 농민군을 지휘하고 있던 지도자는 장흥 이방언 대접주가 유일했다.

관군과 일본군이 장흥으로 진격해 농민군을 초토화시키려는 의도를 잘 알고 있었지만 이방언 대접주와 농민군은 흔들리지 않고 최후의 일전을 준비했다. 이것이 남도동학의 위대함이자 결연함이다.

이방언 대접주는 1만~3만여 명에 달하는 농민군을 통솔해 회령진성, 벽사역, 장녕성, 강진읍성, 병영성 등을 차례로 함락시켰다. 그래서 그를 또한 ‘남도장군’이라 칭한다. 농민군이 남도 땅에서 조일연합군에 맞서 싸워 이긴 전투의 중심에는 이방언 대접주가 있다.

남도전투의 특징은 전봉준 장군 휘하의 주력부대가 괴멸된 상태에서, 농민군이 관군과 일본군에 맞서 처절한 전투를 벌였다는 점이다. 조선관군과 일본군과의 최후의 일전을 위해 장흥 석대들에 모인 농민군의 주력부대는 장흥·해남·강진·무안·진도·영광·순천·화순·담양 등지에서 모인 농민군이었다. 우금치 전투이후 전북지역에서 내려온 농민군도 포함돼 있었다.

남도전투의 위대함은 농민군들이 승산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면서도 관군과 일본군에 맞서 목숨을 걸고 싸웠다는 점이다. 일부에서는 남도 동학군 지도자들이 주도면밀하게 작전을 세워 전투를 벌였더라면 석대들 전투에서 농민군의 희생이 적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숫자만 믿고 최신식 무기와 잘 훈련된 일본병사들과 너무 무모하게 맞서 싸웠다는 것이다.
 

이방언 대접주 상상도
이방언 대접주는 명문가문 출신의 동학지도자였다. 장성 황룡강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으며 전봉준 장군과 함께 농민군을 이끌고 북진했다. 우금치 전투 패배 후 장흥으로 회군해 장흥과 강진성을 함락시켰다./조연희 화백 작품

옳은 지적이다. 그러나 훈련되지 않은 농민들을 대상으로 해 체계적이고 일사 분란한 전투를 기대하는 것은 무리다. 이미 승패는 석대들 전투 초반에 결정지어졌다. 농민군들이 일본군의 매복과 기습에 걸려 큰 피해를 입음에 따라 농민군의 전투 대형과 사기가 무너져 버린 것이다. 이후의 전투는 사실상 관군과 일본군의 농민군 학살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방언 대접주는 남도장군으로 평가받는데 부족함이 없다. 명문가 출신으로 농민들의 안위를 위해 관찰사와 담판을 벌이고, 또 도르뫼 들판에서 농민들을 훈련시켜 농민군 봉기에 대비했다. 집강소를 설치해 장흥부와 강진 병영성의 관군을 억제시켰다. 장흥의 농민군을 이끌고 전북·충청지역의 전투에 참여했으며 이후에는 농민군 연합부대를 이끌고 관군의 세가 컸던 장녕성과 병영성을 함락시켰다. /최혁 기자 kjhyuckchoi@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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