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방언 장군 큰 뜻 이루지 못하고 형장의 이슬로…

남도일보 최혁 주필의 동학유적지(58회)-남도 전투와 이방언 장군(하)

이방언 장군 큰 뜻 이루지 못하고 형장의 이슬로…

석대들 전투 후 은신해있다가 관군에 체포돼 서울로 압송

분명치 않은 이유로 무죄석방됐으나 전라감사가 즉결처형

남도땅 큰 싸움들 승리로 이끈 ‘남도장군’으로 호칭되기도
 

이방언 대접주가 사형당한 장대터
한양으로 끌려간 이방언 대접주는 법무아문 재판에서 의외로 무죄판결을 받는다. 그러나 개화파의 조종을 받던 전라감사 이도재는 고향으로 돌아온 이방언 대접주를 붙잡아 사형에 처한다. 장흥 서초등학교 교정내 예향관 자리가 예전에 이방언 대접주가 목숨을 잃어던 자리로 알려져 있다. /남성진 기자 nam@namdonews.com

이방언 대접주는 1838년 장흥군 용산면 묵촌리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민석(民錫)이다. 조선초기 대재학을 지낸 이문화(李文和)의 19대손이다. 1891년 동학에 입도했고 1893년 보은집회에도 참가했다. 장흥군 용산면 접정리 2구 묵촌마을 앞 도르뫼 들판에서 농민들을 훈련시켜 장차 있을 관군과의 싸움에 대비했다.
 

70년대에 촬영된 장대터 모습./동학농민혁명기념관 제공

1894년 음력 3월 전봉준의 봉기에 호응해 봉기, 4월 23일 장성 황룡촌 전투에 참가해 관군을 상대로 대승을 거둔다. 이때 이방언 대접주는 농민군이 대나무를 엮어 만든 장태를 사용하면서 진격하게 해 관군의 사격을 무력화시킨 것으로 전해진다. ‘전주화약’ 이후 장흥으로 돌아왔으나 9월부터 장흥부사의 동학 탄압이 심화되자 다시 기포해 벽사역과 장흥부, 강진현, 병영성 등을 차례로 점령했다.

12월 15일 석대들 전투에서 패배, 12월 25일 체포돼 나주로 압송됐다. 이후 서울로 압송돼 재판에 회부됐으나 무죄 석방됐다. 그러나 고향으로 돌아온 1895년 4월에 다시 체포돼 장흥 장대에서 처형당했다. 체포 및 처형일자는 명확치 않으나 4월 25∼27일 사이인 것으로 추정된다.

동학농민혁명으로 인해 이방언 대접주가 얻은 별호 및 직함 등은 장흥대접주를 비롯해 남도장군, 관산장군, 장태장군, 삼남도교장(三南都敎長)등이다. <일청교전 종군일지> 12월 17일조에서는 이법헌(李法軒)라 기록돼 있기도 하다. 법헌(法軒)은 ‘동학의 최고 어른이 있는 법소(法所)’라는 뜻이다.

이방언 대접주는 석대들 전투에서 패한 뒤 남상면에 숨어 있다가 1894년 음력 12월 24일 심복인 고순칠(高順七), 도성찰(都省察) 마경삼(馬京三) 등과 함께 체포됐다. 이방언 장군의 은신처를 발견해 관아에 알린 사람은 남상면의 백중인(白重寅)이다.
 

이방언 대접주의 묘
묘비에 남도장군 이방언이라 쓰여져 있다. /동학농민혁명기념관 제공

이방언 대접주는 나주로 압송된 뒤 한양으로 끌려가 법무아문의 감옥에서 대략 50일 정도 수감됐다. 그러나 이방언 대접주는 서울 무죄판결을 받고 석방된다. 조선조정을 손에 쥐고 흔들어대던 일제가 이방언 대접주에 대해 무죄판결을 내린 이유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이방언 대접주와 가까운 사이였던 대원군이 영향력을 발휘했다는 설에 대해 위의환씨는 당시 대원군은 그가 조작한 동학당 선동 국왕밀지 사건으로 손자 이준용(李埈鎔)과 함께 곤욕을 치르고 있었기에 동학당 수뢰를 구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법무아문에서 작성한 이방언 무죄판결문. 증거가 적확치 않아 무죄판결한다고 적혀 있다.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이방언 대접주는 사형당하지 않고 1895년 음력 3월21일 석방된다. 그 뒤 1895년 4월 초순 무렵 보성읍과 가까운 장흥부 회령면(현 보성군 회천면) 신기리 이의원의 집에 주위의 동향을 살피며 은신해 있었다. 그러나 이방언 대접주가 석방돼 보성에 있다는 소식을 들은 전라감사 이도재가 군사를 보내 이방언 대접주를 체포해와 곧바로 장대터에서 사형에 처해버린다.

전라감사 이도재는 고금도에 귀양돼 있다가 1894년 김홍집의 개화파 내각이 들어서자 풀려나온 인물이다. 개화파 정부의 비호를 받으며 군국기무처의원을 거쳐 전라감사의 자리에 올랐다. 그런 인물인 만큼 일본이 진정 무엇을 원하는지를 헤아렸을 것이다. 혹은 개화파와 일본군으로부터 ‘이방언을 죽이라’는 밀지를 받았을지도 모른다.

그런 배경이 있었기에 이도재는 상급기관인 법무아문이 무죄 방면한 이방언과 김방서, 박태길을 처형할 수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도재는 그런 충성을 인정받아 개화파 정부에서 군부대신을 거쳐 학부대신으로 발탁된다. 개화파 정부에 일본에 충성을 바쳐 출세의 길을 걷기 시작한 것이다.

박기현의 <일사>에는 이방언의 처형소식이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4월 27일 들으니 장흥 사괴(邪魁·동학군 우두머리) 이방언이 열 대신에게 아부하여 석방돼 가마를 타고 양양하게 벽사역으로 내려왔다. 관에서 붙잡아 목을 베니, 성 마을 백성들이 일제히 와서 마구 찢어 배를 가르고 해체하였다고 한다”

조정의 열 대신에게 아부를 해 석방됐다거나 가마를 타고 벽사 역으로 내려왔다는 내용은 이방언 대접주를 조롱하거나 그에 대한 반감을 부채질 하기위해 의도적으로 퍼뜨린 말로 해석된다. 그러나 장흥백성들이 몰려와 사체를 훼손했다는 말은 농민군이 장녕성을 함락시키는 과정에서 관군 측의 인명피해가 커 이방언 대접주에 대한 유족들의 원한이 깊었던 만큼 어느 정도 사실로 여겨진다. /최혁 기자 kjhyuckchoi@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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