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력 컸던 진도동학군 함평·석대들 전투까지 참가

최혁 남도일보 주필의 남도동학유적지(59회)-진도군 동학전파 역사와 진도농민군

세력 컸던 진도동학군 함평·석대들 전투까지 참가

조도면 박중진 접주 중심으로 진도 장악 후 활동

영광·무안·해남·무장 농민군 지원받아 진도성 점령

관군 토벌하면서 수 백 명 농민군 잔혹하게 참살
 

진도 고지도
진도는 한반도의 서남해안 바다를 가로지르는 곳에 위치해 있어 매우 중요한 섬이다. 따라서 백제·신라·고려·조선시대를 거치며 많은 격변을 겪었다. 왕건과 견훤의 쟁패와 삼별초항쟁, 임진·정유재란, 동학농민혁명과 같은 역사적 격랑이 일었다.

■진도군 동학전파 역사

진도군에 동학이 최초로 전해진 때는 1892년 1월이었다. 천도교측 자료인 <진도종리원연혁>에 따르면 의신면(義新面) 만길(滿吉)에 사는 나봉익과 양순달이 처음 동학을 받아들였다고 한다.

진도에 처음으로 동학을 전파한 이는 나주에서 온 나치현이다. 나봉익, 양순달 등은 1893년 3월에 보은집회에도 참가했다. 진도는 이후 동학교도가 크게 늘어났으며 의신면과 고군내면(古郡內面), 조도면(鳥道面), 진도면(珍島面)에 교인들이 많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진도읍성
1905년 전후에 찍힌 것으로 보이는 진도읍성내 모습. 전체적으로 희미하나 옛 진도의 모습을 알 수 있는 매우 희귀한 사진이다. 장흥의 향토사학자 양기수씨가 보관하고 있는 사진이다.

동학농민혁명 당시 진도 농민군은 전라도 남서부인 무안, 해남, 영광 지역 농민군들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움직였다. <선봉진각읍료발관급감결(先鋒陣各邑了發關及甘結)>에 의하면 진도지역 농민군 지도자는 김광윤, 나치현, 나봉익, 양순달, 허영재, 김수종, 손행권, 박중진 등이었다.

진도지역 동학농민군의 활동이 처음으로 기록에 등장한 것은 1894년 7월이다. <순무선봉진등록>에는 진도지역 농민군에 대한 기록이 다음과 같이 나와 있다. 관군 측의 기록이라 동학농민군들의 행적을 도적처럼 표현한 것이 눈에 띈다.

“금년 7월에 조도면 적괴 박중진(朴仲辰)이 영광과 무장 등지에서 무리를 모아 배를 타고 진도에 들어왔다. 성을 공략하고 수성군을 살해하고 재물을 노략질했다. 군기를 약탈하고 마을에 머물면서 불을 지르고 가산을 부수며 백성의 재물을 탈취했다.”

진도 접주 박중진이 1894년 7월 해남지역 농민군의 지원을 받아 무안, 영광 등지의 농민군과 함께 진도성을 공격해 점령했다는 내용이다. 이 내용에서 보듯 전남 서해안지역 농민군들은 서로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조직적으로 연합작전을 펼쳤다.

진도 접주 박중진은 진도 수성군이 완강히 저항하자 손화중 대접주를 찾아가 지원을 요청했다. 이에 무장과 영광 일대의 농민군이 진도 농민군을 지원해 진도성을 장악해 집강소를 운영했던 것으로 보인다. 동학농민군이 진도를 점령하자 당시 진도군수 이희승은 자리를 비우고 사라져 버렸다. 후임군수가 부임한 것은 9월 18일이었다.

부사는 1천322명의 수성군을 조직하고 농민군에 맞서 싸웠다. 2차 기포 후 진도 농민군은 함평 고막포 전투에까지 참가했다. 당시 진도농민군으로 활동한 이는 김광윤, 나치현, 나봉익, 양순달, 허영재 등이었다.
 

박주언 선생과 최혁 주필
박주언<왼쪽> 선생은 진도동학농민혁명 등 진도향토사를 연구하고 있는 사학자이다. 진도 농민군들이 많이 희생당한 솔개재 등 진도지역 동학유적지들을 함께 다니면서 많은 도움말을 주었다.

■진도 향토사학자 박주언 선생

진도지역의 동학전파와 동학농민혁명 전개, 그리고 그 후 진도주민들의 항일운동, 동학농민운동사 정리 등에 대해 조언해주신 분은 박주언 선생이다. 박 선생은 진도출신으로 진도지역 역사와 향토문화에 깊은 지식과 남다른 애정을 갖고 계신 분이다.

박 선생은 지난 1970년대부터 언론인으로서 진도지역의 문화와 역사를 정리하고 발굴하는데 정성을 기울여왔다. 진도의 문화유산과 역사적 가치를 보전하고 그 의미를 더하는데 상당한 역할을 해왔다. 박 선생은 일본인 학자들과 교류하면서 진도지역 동학지도자를 연구하고 있다.

최근에는 전주역사박물관 지하 수장고에 보관돼 있는 진도출신 동학농민군의 유골에 대한 안장반대 및 진도송환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일본인에 의해 지난 1906년 반출됐던 진도 동학농민군 지도자의 유골은 120년 동안 일본 홋카이도 대학의 창고와 전주역사박물관 지하 수장고 등을 전전하고 있다.

이 유골의 주인공은 진도출신이 분명한데도 전북 전주시가 소유권을 주장하며 완산공원에 안장할 계획이었다. 화장될 위기에 놓였으나 진도군 등의 반대로 고비를 넘겼다. 박주언 선생은 진도동학군 유골송환을 위해 진도군민들의 뜻을 모으고 있다.

또한 인류문화적인 측면에서 진도지역 주민들의 생활상과 변천과정을 기록하고 분석하는데 힘을 보태고 있다. 진도평화제 추진본부장을 맡아 중국·일본·몽골을 비롯한 세계인들의 화합을 위해서도 애쓰고 있다.

특히 박 선생은 진도지역 동학농민혁명의 전개와 유적지에 대해 많은 글을 썼다. 박주언 선생이 과거에 발표한 ‘동학(東學)과 진도사람들’과 ‘진도에 나타난 50명의 항일의병’등은 진도의 동학농민혁명사를 연구하는데 큰 도움이 되고 있다.

진도지역 동학농민혁명과 항일운동에 대해서 더 쉽고 깊이 이해하려면 박주언 선생이 쓴 글을 그대로 게재하는 것이 더 낫겠다는 생각이다. 그래서 박 선생의 양해아래 그의 글 ‘진도동학농민혁명의 재발견’을 다음 60회부터 몇 차례에 걸쳐 싣는다.

이글은 박주언 선생이 지난해 12월 12일 장흥동학농민혁명기념관에서 해남·진도·제주·완도·장흥·영암·강진·장성·무안 등 9개 지역 동학농민혁명 기록 연구자들과 관련단체 관계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2015남도동학농민혁명포럼’에서 발표한 것이다.

/최혁 기자 kjhyuckchoi@hanmail.net

 

"광주전남 지역민의 소중한 제보를 기다립니다"  기사제보
저작권자 © 남도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