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세 컸던 진도, 갑오항쟁의 상처와 피해도 깊어

최혁 남도일보 주필의 동학유적지-(60회, 진도동학농민혁명의 재발견<가>)

동학세 컸던 진도, 갑오항쟁의 상처와 피해도 깊어

진도에 1892년 나주접사 나치현이 동학전파 급속히 勢 확산

조도면 유토리 박중진 접주 중심으로 농민군 진도읍성 공격

항쟁 실패후 수백명 농민군 역도로 몰려 곳곳서 처참한 죽음
 

솔개재. 동학세가 컸던 진도는 갑오항쟁의 후유증이 너무도 컸다. 관군은 수백명의 동학 농민군을 참살해 솔개재 등에 묻은 것으로 알려졌다./진도 향토사학자 박주언씨 제공

이 글은 박주언 선생이 지난해 12월 12일 장흥동학농민혁명기념관에서 해남·진도·제주·완도·장흥·영암·강진·장성·무안 등 9개 지역 동학농민혁명 기록 연구자들과 관련단체 관계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2015남도동학농민혁명포럼’에서 발표한 것이다.

진도지역 동학농민혁명 전개사를 자세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오랫동안 진도지역 갑오항쟁을 연구해온 박주언 선생의 글을 그대로 싣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이다. 선생의 글을 몇차례에 걸쳐 싣는다.

■진도동학농민혁명의 재발견

박주언(진도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공동대표)

▲글을 시작하면서

진도의 동학관련기록은 1995년 7월25일 진도동학지도자 해골이 일본에서 발견되면서부터 획기적으로 보완, 정리되었다. 그동안 진도군지(1976년 발행)에 2쪽도 채 안 되는 내용으로 소개된 ‘동학란’은 그나마 역도들의 반란사건처럼 기술되었다. 해골 발견 이후 국내외 관심이 진도에 집중되면서 사료보완에 박맹수 교수(원광대)의 광범위한 노력이 크게 기여했다.

동학이 진도에 들어온 것은 1892년 1월 나주접사 나치현(羅致炫)에 의해서였다. 그는 의신면 원두리 나봉익(羅奉益), 양순달(梁順達)을 포섭하여 김광윤(金光允), 김대욱(金大旭), 김윤선(金允선), 김수종(金秀종), 김중야(金仲也), 박중진(朴仲振), 서기택(徐기택), 손행권(孫行權), 이문규(李文奎), 이방현(李方鉉), 주영백(朱永白), 허영재(許瑛才) 등을 중심으로 진도의 동학농민운동세력을 확산케 했다. 물론 이들 외에도 지도자급 진도동학군이 있었겠지만 차후 정리되기를 기대한다.
 

1894년 9월 12일 청일전쟁 당시 인천항에 상륙한 일본군. /인천광역시청 홈피

조도면 유토리 출신 박중진은 진도의 동학농민군 지도자로 알려졌으며 행적 또한 특별했고 전하는 이야기도 많다. 그는 영광, 무장 등지에서 농민군을 모아 선편으로 진도에 와서 읍성을 공격하여 사람을 죽이고 군기를 빼앗아 마을로 다니면서 불을 질러 재산을 부수고 재물을 약탈했다. 이에 민중이 모여 박중진을 비롯한 우두머리 몇 사람을 붙잡아 여러 날을 가두었다고 한다.(순무선봉진등록 동학란기록상)

박중진에 대해 그의 조카뻘인 박정두씨(목포 거주, 1996년 당시 74세)는 말했다.

“박중진씨는 전라도 동학의 주동자였다. 동학이 진도에 들어온 것도 그분에 의해서였는데 그는 언제나 가난한 농어민들을 위해 노력했던 지식인이었다. 동학군 진압 당시 그의 집은 불에 타 사라졌다. 문중 사람들은 그분이 만약 조선시대 같으면 과거를 보아 큰 인물이 되었을 사람이라는 얘기들을 했다.”
 

청일전쟁(1894∼1895년) 당시 일본군이 행군하는 모습./한국민족문화대백과

동학농민혁명 이후 망해버린 그의 집안을 조도에서는 ‘도둑놈 박씨’ 또는 ‘몽둥이 박가’라 불렀다는 것이다. 최소한 조도에서는 철저히 배척된 활동가로 그의 문중까지 어렵게 되어 심지어 족보조차도 스스로 없애버렸다가 나중에 박정두씨가 다시 만들었다고 한다. 이처럼 동학농민혁명은 한동안 역도들의 반란으로 단정되었던 것이다. 전봉준 장군과는 형 아우로 지냈다는 박중진은 진도군지(1976년) 동학란에 등장하는 유일한 동학농민군 인물이다.

그 뒤 20여 년 동안 진도동학농민혁명 연구는 해골문제를 거치면서 진도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를 발족시켰다. 또 오늘 발표하는 부분적인 발굴내용을 확보한 셈이다. 내용은 1904년 12월11일 진도로 부임한 권중면 군수의 40여만 동학도 사면 이야기와 아들 권태훈 옹을 통하여 알게 되는 서문 밖 동학군 800명 총살현장 이야기가 매우 중요한 부분으로 다가왔다.
 

청일전쟁 당시의 일본군 보병부대가 사격하는 모습.

논픽션 작가 허진구의 증조부가 동학에 합류코자 대대로 살아온 고향을 버리고 정읍으로 이주한 사실도 당시의 동학에 대한 인식을 감지케 했으며, 조도 박태주 선생의 공덕비문을 동학과 연계한 해석은 그분이 박중진의 13세 연하로 같은 마을 사람이어서 더욱 가능성을 높였다. 그러나 진도의 동학사료는 보다 더 나타날 소지가 있어 백방으로 안테나를 세워둔 입장이다./최혁 기자 kjhyuckchoi@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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