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도동학지도자 박중진-진도농민 이끌고 새 세상 열기위해 한 몸 바친 혁명가

<63회, 진도동학농민혁명의 재발견(라)-진도동학지도자 박중진>

진도농민 이끌고 새 세상 열기위해 한 몸 바친 혁명가

전봉준과 호형호제 진도읍성 점령위해 수차례 공격감행

관군에 붙잡혀 참형 당한 뒤 조도 밀양 박씨 문중 수난

진도상징 동학지도자여서 북해도大 유골 주인공으로 인식
 

진도읍성 남문자리
진도읍성이 서 있던 자리. 일제는 조선점령 후 진도읍성을 헐어 버렸다. 이후 그 자리에는 일본건물이 들어섰다. 최근 진도문화원이 발견한 사진이다. 이 사진에 대해 어떤 이들은 진도읍성 남문(망해루) 해체공사라고 주장하고 있다. 한편으로 다른 이들은 남문자리에 들어선 일본식 건물을 광복 후 헐어버리고 있는 사진이라는 의견을 내놓고 있다. 분명한 사실은 사진 중앙 사람들이 서 있는 남문 앞 공터에 관군들이 동학농민군들의 시체를 버려두고 진도농민들에게 겁을 주었다는 것이다./ 진도문화원 제공

◆박중진(朴仲振)은 누구인가?

진도군 조도면 창유리 출신 박중진은 진도의 동학농민군 지도자로 알려졌다. 행적 또한 특별했고 전하는 이야기도 많다. 관군기록인 <순무선봉진등록>에는 박중진에 대한 기술이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박중진은 영광 무장 등지에서 농민군을 모아 배편으로 진도에 와서 읍성을 공격하여 사람을 죽이고 군기를 빼앗아 마을로 다니면서 불을 질러 재산을 부수고 재물을 약탈했다. 이에 진도수성군(민중)이 모여 박중진을 비롯한 우두머리 몇 사람을 붙잡아 여러 날을 가두었다”

그러나 박중진은 진도동학의 지도자였으며 백성들을 위해 헌신했던 인물이었다. 박중진의 조카인 박정두씨(목포 거주, 1996년 당시 74세)는 박중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증언하고 있다.

“박중진씨는 전라도 동학의 주동자였다. 동학이 진도에 들어온 것도 그분에 의해서였는데 그는 언제나 가난한 농어민들을 위해 노력했던 지식인이었다. 동학군 진압 당시 그의 집은 불에 타 사라졌다. 문중 사람들은 그분이 만약 조선시대 같으면 과거를 보아 큰 인물이 되었을 사람이라는 얘기들을 했다”

동학농민운동 이후 망해버린 그의 집안을 조도에서는 ‘도둑놈 박씨’ 또는 ‘몽둥이 박가’라 불렀다. 관군의 철저한 탄압과 동학에 동조하지 않았던 이들의 멸시 때문에 박중진의 집안은 조도에서 철저히 배척됐다.

박중진에 대한 의도적인 멸시와 흔적지우기는 그의 문중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박씨 문중은 박중진이 역도로 몰리고 친인척들까지 경원의 대상이 되자 박중진을 족보에서 빼버렸다. 이후 박중진은 박정두씨에 의해 다시 족보에 올려지게 됐다.

진도동학농민혁명에서 박중진은 매우 중요한 인물이다. 진도동학농민군을 상징하고 있다. 구전에 따르면 박중진은 전봉준과도 호형호제하는 사이였다. 이런 이유에 많은 진도사람들은 북해도 대학에서 발견된 ‘진도농민군 유골’을 박중진의 유골로 생각하고 있다.

북해도 대학으로부터 해골이 전주에 도착한 1996년 5월31일 덕진종합운동장 봉환식장에 ‘박중진 장군 유해귀환’이라는 수많은 현수막이 내걸린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박중진은 동학농민혁명의 영웅이자 외세로부터 이 나라를 지키기 위해 한 몸을 불사른 자랑스러운 진도인이다.

◆해골의 주인공이 박중진으로 알려진 경위

북해도 대학에서 동학농민군의 유골이 발견된 후 한국에서는 유골봉환여론이 높아졌다. 북해도대학 측은 즉시 조사위원회를 구성하고 봉환을 위한 절차를 밟아가기 시작했다. 조사위원 이노우에 가쓰오 교수는 진도 향토사학자 박주언에게 전화해 유골의 주인공이 누구로 추정되는지를 물어보았다. 그는 동경대학교 이토 아비토 교수(문화인류학)로부터 소개받아 연락한다고 말했다.

박주언은 <진도군지>(1976년)에 진도동학도로는 유일하게 조도면 출신 박중진이 기록돼 있는만큼 그 분일 가능성이 있다고 대답했다. 이 대답은 북해도대학 발견 유골이 박중진의 유골로 여겨지는 계기가 됐다. 몇 차례의 언론보도 과정을 거치면서 이 유골은 ‘박중진의 유골’로 거의 확정돼 버렸다.

이듬해인 1996년 5월 31일 전주 덕진공원에서 거행된 진도 동학지도자 해골의 봉환식장에는 ‘동학농민혁명 박중진 장군 고국봉환 환영’의 플래카드가 물결치고 있었다. 봉환 당시 북해도대학은 박주언씨에게 전화를 걸어와 여러 가지를 상의해 왔다. 가령 해골봉환을 요구하는데 어떻게 하면 좋겠냐, 어디로 봉환해야 하느냐는 것 등이었다.

박주언씨는 유골은 한국으로 봉환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고 시기도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고 대답했다. 또 봉환장소도 진도가 마땅하다고 조언했다. 그러나 진도에는 마땅한 보존시설이 없으니 일단 전주박물관에 모신 다음 진도에 보존시설이 생기면 그 때 진도로 옮기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북해도 대학 측은 진도향토사학자 박주언씨의 의견을 따라 유골의 봉환절차를 밟아나갔다. 당시 전주박물관 측도 북해도대학 측의 이 같은 입장을 잘 헤아려 수장고에 유골을 보관했다. 이전 전후 사정으로 북해도대학에서 발견된 진도동학농민군유골은 전주박물관수장고에 보관되게 됐다.
 

밀양박씨 숙민공파 가승세보.

■박중진의 가계(家系)

박중진, 영의정 숙민공(肅愍公) 박승종(朴承宗) 후손

조도면 밀양 박씨들은 박승종 차남 박자응에서 나와

밀양박씨 시조 박언침은 박혁거세의 29세손인 경명왕의 장남으로 밀성대군에 봉해져 후손들이 밀양을 본관으로 삼는다. 박언침의 16세손으로 고려 중엽 사헌부 규정을 지낸 박현(朴鉉)이 밀양박씨 규정공파조이다.
 

박중진의 이름이 올라있는 족보. 진도동학농민군 지도자 박중진은 밀양박씨 숙민공파로 족보상 이름은 종순(鍾恂)이며, 일명 중진(仲辰)이다.

그의 6세손 청제공 박심문(朴審問)은 청제공파조로 진도 밀양박씨 대부분이 청제공 후손들로 정리되고 있다. 그러나 조도를 위주로 세거하는 숙민공파는 박심문의 형 박절문(朴切問)의 9세손으로 광해조 때 영의정을 지낸 박승종(朴承宗 1562∼1623)을 파조로 삼는다.

박승종은 대제학 이조판서 박충원(朴忠元)의 증손자이며, 병조판서 박계현(朴啓賢)의 손자이자 지돈령부사(정2품) 박안세(朴安世)의 아들이다. 승종은 25세에 문과급제 후 나라의 기밀을 다루는 봉교(奉敎·왕의 칙서를 기록하는 자리), 지제교(知製敎·왕이 내리는 교서 등을 기초하여 올리는 실무자) 등 중신협의를 통해 결정하는 중요한 자리를 맡았다.

그는 선조 말기에 병조판서가 되고 광해군 2년 형조판서를 거쳐 판의금부사, 우의정 겸 도체찰사, 그리고 58세에 영의정에 올랐다. 당시의 명·청관계(明淸關係)를 잘 수습하여 외교적 수완을 인정받았던 인물이었다.

그러나 인조반정이 일어난 1623년 3월 14일 도성을 벗어나 장남과 함께 과천 어느 절에서 자결했다. 오랫동안 요직에서 권세를 누린 점을 자책하며 방안에서 목에 줄을 메어 밖에서 종에게 잡아당기게 하는 특별한 방법으로 숨졌다.

당시 62세였고 장남은 43세였다. 반정 후 관직삭탈과 가산적몰을 당했다가 사후 234년만인 1857년 송시열과 후손들의 노력으로 복권되면서 숙민이라는 익호를 받아 숙민공 파조가 되었다.

그의 장남 박자흥(朴自興)은 1581년생으로 광해군 때 정국을 주도했던 이이첨의 사위가 됐다. 1610년 문과급제로 사간원 정언으로부터 전라감사, 홍문관 부제학, 형조참판, 대사성을 거쳤다. 박자흥의 딸이 광해군의 세자비가 되어 사돈 간으로 권세를 누렸으나 경기관찰사 때 인조반정을 만나 아버지와 함께 자결했다.

조도면 등지에 사는 숙민공파는 박승종의 차남 박자응(朴自凝)의 후손들이다. 그는 1589년생이며 1609년 문과급제로 세자시강원사서로부터 홍문관 부교리, 성균관직강, 세자시강원문학을 거쳐 성균관 전적을 지냈다. 인목대비 폐출문제가 협의되는 회의에 신병을 핑계로 불참하여 고산현감으로 좌천되었고 영광군수 의정부사로 있을 때 인조반정을 만났다.

반정 당시 왕궁경호와 훈련대장을 맡은 이흥립은 반정군에게 궁궐문을 열어주어 광해군을 폐위케 했다. 반정 후 그 공로로 정사공신 1등이 되었으나 1624년 이괄의 난에 또 변절하였다가 난이 평정되자 자결했다.

그의 사위인 박자응은 인조반정 때는 장인 덕분에 죽음을 면했지만 이듬해 장인 모반 후에 삭과(과거합격등록에서 삭제)되고 재산을 적몰당하면서 제주도에 유배당했다. 1628년 진도로 이배 위리 안치돼 1년 뒤 탱자나무 울타리만 철거되었는데 그 뒤 그의 행적은 아직 정리되지 않았다.

일본에서 발견된 진도 동학지도자의 해골 주인공이 박중진으로 알려지면서 그에 대한 관심이 모아졌다. 진도군 조도면 중심으로 세거하는 그의 집안은 박자응의 후손인 밀양박씨 숙민공파이다. 숙민공 영의정 박승종의 후손들이다.

글/박주언 진도향토사학자·정리/최혁 기자 kjhyuckchoi@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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