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록도 단상
소록도 단상
<김세곤 호남역사연구원장>
소록도를 갔다. 구라탑을 지나니 천형(天刑)의 시인 한하운의 ‘보리피리’ 시비가 있다. ‘수호원장 동상’ 안내판도 보았다. 일본인 원장 수호의 행위를 참지 못하여 이춘상은 1942년 6월 20일에 그를 살해했다. 소록도에서는 이춘상을 ‘제2의 안중근’이라 칭한다.
감금실과 검시실을 구경했다. 일제는 1935년부터 ‘조선나(癩)예방령’을 시행하여 나환자들을 강제 수용했다. 감금실에서 단종 수술을 했고, 나환자가 죽으면 검시실에서 해부했다. 나환자는 두 번 죽었다.
생체실험도 다반사였다.
최근 개관한 ‘한센병 박물관’을 관람했다. 박물관 입구에 ‘한센병. 인류 역사는 질병극복의 역사였고, 한센병 또한 극복하였다’라고 적혀 있다. 그 위에는 ‘한국사 속 한센병’ 연표가 있다.
▲1428년 세종실록에 나질(癩疾)이라는 병명 출현 ▲1445년 제주에 구질막 설치 ▲1873년 2월 노르웨이의 한센, 나균 발견 ▲1916년 2월 24일 소록도 자혜의원 설립.
다음에 ‘제주목사 기건(奇虔 ? ~1460)’ 전시물이 있다.
조선시대 사람들은 감염을 우려하여 한센병에 걸린 이를 아무도 없는 곳으로 옮겨 저절로 죽기만을 기다렸다. 세종 25년(1443년) 제주목사로 부임한 기건은 관내를 돌아보다가 바닷가 바위 밑에서 신음하는 한센병 환자를 발견하였다. 그 이유를 알게 된 기건은 곧바로 구질막(救疾幕)을 설치하고, 한센병 환자 100여 명을 모아 남녀를 따로 지내게 하였다. 또 고삼원(苦蔘元)을 먹이고 바닷물에 목욕을 시키며 많은 사람을 고치는데 힘썼다. <문종실록 7권(문종 1년)>
1451년 4월 2일자 문종실록 내용이다. 기건이 누구인가? 호는 청파(靑坡)인데 집이 청파의 만리현(萬里峴)에 있었다. 학행(學行)으로 이름이 높아 세종 때 과거시험을 거치지 않고 발탁되었다.
기건은 청백리였다. 일찍이 연안(延安)군수였을 때, 군민들이 붕어 바치는 것 때문에 피곤해 하니 3년 동안 먹지 않고 또 술도 마시지 않았다. 체임했을 때에 부로(父老)들이 전송하니, 기건이 종일토록 마셔도 취하지 않았다. 부로들이 ‘이제야 우리 백성을 위하여 붕어를 먹지 않고 술을 마시지 않은 것을 알겠다’ 하면서 탄복했다.
기건이 제주목사로 부임하자 이번에는 전복을 먹지 않았다. 성현(1439~1504)은 ‘용재총화’에서 이렇게 적었다.
기건이 평생 전복을 먹지 아니하므로 사람들이 그 까닭을 물으니 ‘일찍이 제주목사 때 백성들이 바닷물 속에 들어가서 전복 따기에 몹시 괴로워하는 것을 보았으므로 먹을 수가 없다’라고 하였다.
‘측은지심’을 실천한 기건의 후손은 명유(名儒)가 여럿이다. 퇴계 이황과 사단칠정 논변을 한 고봉 기대승, 조선 성리학 6대가인 노사 기정진이 그들이다.
다음 전시물은 84인 학살사건이다. 1945년 8월 15일. 그러나 한센인에게는 해방이 오지 않았다. 8월 20일 전후하여 한센인 84명이 소록도 갱생원 직원과 고흥 치안대에 의해 학살당했다. 이 사건은 56년 후인 2001년 12월 8일 유골 발굴작업으로 전모가 세상에 드러났고, ‘애한(哀恨)의 추모비’가 세워졌다.
또한 ‘4·6 사건’을 읽으면서 경악하였다. 해방이 되었어도 병원 측은 일제가 한 것처럼 여전히 가혹행위와 생체실험을 했다. 1954년 4월 6일에 한센인은 궐기했으나 주동자는 끌려갔다.
다음으로 본 것은 ‘한센인 사건 법’이다.
2007년에 정부는 해방이후 한센인에게 가해진 학살·감금·폭행·강제노역·단종·낙태의 피해진상 규명과 피해자의 지원을 위해 법을 제정하였다.
궁금하여 ‘한센인 사건 법’을 검색했다. 그랬더니 ‘한센인피해사건’이 아예 법률에 명시되어 있다. 한센인은 1945년 8월 16일부터 1963년 2월 8일까지 폭행, 감금 또는 단종수술을 당했고, 1962년 7월 10일부터 1964년 7월 25일까지 고흥군 오마도 간척사업에 강제노역 당했다.
한센인은 일제강점기와 마찬가지로 제3공화국까지도 문둥이 취급을 받은 것이다. 이러함에도 전시물에는 ‘이 법은 일본과 대만의 법과 함께 한센인 인권침해 보상에 관한 세계적인 대표 법률’이라고 적혀 있으니 조금 황당하다.
소록도 100년은 멸시와 아픔의 역사였다. 앞으로 천년은 생명과 사랑의 역사였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