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0여명 농민군 모두 총살당한 뒤 서문 밖 밭에 매장돼

남도동학혁명유적지-<64회,진도동학농민혁명의 재발견(마)>

800여명 농민군 모두 총살당한 뒤 서문 밖 밭에 매장돼

1904년 부임한 권중면 진도군수 아들 권태훈 옹의 증언

여덟척 배 타고 진도 들어온 동학군 원혼돼 구천 떠돌아

권중면 군수 고종에 건의해 체포된 동학군 석방시키기도
 

진도읍 송현리 솔개재
동학군들이 집단으로 매장당한 곳이다. 과거에는 주민들이 발길을 꺼려했으나 지금은 주변이 많이 개발됐다. /박주언씨 제공

구한말의 관리 권중면(權重冕, 1856~1936)은 고종에게 건의해 관군에 체포돼 옥에 갇혀 있던 동학농민군들이 석방되는데 기여했다. 권중면은 그 뒤 진도진수로 내려와 농민들이 갑오항쟁의 소용돌이에서 얼마나 처참하게 목숨을 잃거나 희생당했는지를 잘 알게 됐다.

권중면은 진도에 내려올 때 5살 된 아들을 데려왔는데 그 아들이 단학의 대가 권태훈 선생이다. 권태훈 옹은 8살이 될 때까지 3년 동안 진도에서 살았다. 아버지 권중면을 통해 동학란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듣고 자랐다. 권태훈 옹이 어렸을 때 들은 동학란에 대한 이야기는 진도지역 동학농민군의 피해를 짐작해보는데 소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아래 글은 진도향토사학자 박주언 선생이 권중면 군수 부부의 이야기와 권태훈 옹의 증언을 읽기 쉽게 엮은 것이다. <편집자 주>

■권중면 군수와 진도의 도깨비불

▶권중면 군수와 동학=1904년 12월 11일 진도군수로 부임한 권중면은 내부 판적국장, 법부 검사국장, 한성재판소 판사, 고등재판소 판사, 비서원승, 시종원 시종 등을 두루 거친 사람이다. 권 군수가 1907년 1월 29일까지 근무하고 능주 군수로 떠난 그 해 7월 20일 고종이 폐위되었다. 그러자 권중면 부부는 대성통곡을 했고, 아내 경주 김씨는 8세 아들을 껴안고 말했다.

“임금이 욕을 당하면 신하는 죽어야 마땅하므로 자결하려 했지만 3대독자인 너를 두고 차마 죽지 못했다. 너는 이것을 알아라.”

고종폐위는 그에게 그만큼 큰 충격을 주었던 것이다. 그이가 고종 임금에게 전례와 의식에 관한 일을 포함해 왕실사무에 대한 임금의 자문에 응하는 특진관을 맡았을 때였다. 따라서 임금을 독대할 기회가 가끔 있었는데 어느 날 붙잡혀 있는 동학도들의 선처를 임금께 진언했다. (동학농민운동이 진압된 다음해인 1895년쯤으로 추정된다)

“황제 폐하, 지금 갇혀있는 동학도들이 총살당할 사람도 있지만 40만 모두 총살하기는… 다 폐하의 백성이온데 모두 총살이라니 너무 과하지 않사옵니까? 그리고 나라를 소요시켰다 해서 소요범으로 죽이는 것이온데, 시작한 사람은 소요했을지 모르지만 밑에 따르는 사람이야 무엇을 알았겠사옵니까?”

그러자 고종 임금은 그의 건의를 즉시 받아들였다.

“글쎄, 내 생각도 그러하다. 천명을 죽이면 백성이 천 명 줄고 30만 명이나 40만 명 죽이면 그만큼 우리 백성이 죽는 건데 나도 그런 생각이 있어. 그럼 특사를 놓아볼까?”

“올바른 통촉이시옵니다. 하오면 백성 수십만이 살아납니다. 폐하!”

“그러면 10대신을 다 부르라!”

총리대신을 포함해 10명의 대신들이 모두 모인 자리에서 임금은 입을 열었다.

“요번 동학군으로 먼저 죽은 사람이 한 10만 명인데, 나머지 지금 잡혀 갇혀있는 사람들이야 뒤에서 모르고 하던 촌사람들 아닌가? 그들을 모두 죽여야 하느냐?”

그러자 대신들 가운데 누군가가 말했다.

“폐하께서 통촉해서 하소서!”

또 누군가는 “특사령을 놓으시는 것이 어떠하올는지요?” 라고 아뢰었다. 이렇게 하여 임금은 특사를 결정하시고 대신들은 전원 동의 수결(사인)을 했으며 곧 사면이 단행되었다.

권중면은 그 뒤 진도군수로 자리를 옮겼다. 아내 김씨는 6살 아들에게 한학공부를 위한 기억력증진 방법으로 민족고유수련법인 조식법(調息法)을 가르쳤다고 한다.

아들 권태훈(1900∼1994)은 4세에 아버지에게서 한학을 시작하여 진도에 와서 6세부터 유배당해있던 무정 정만조에게 사서(四書)를 배웠고 8세 때는 많은 경전을 읽었다. 10세에 단군교(대종교)마포 포교당에서 나철 선생을 만난 이후 평생 정신적 뿌리로 삼았으며 15세에 일본에 가서 무술 영술의 대가들을 만나고 배웠다.

그리고 18세에 당시 장안 재사들의 모임인 이문회(以文會)에 무정의 추천으로 출입하게 되어 최남선, 홍명희, 한용운, 이광수, 임규, 권덕규, 홍헌희 등과 교우를 가졌다. 유불선 3도에 통달했다는 그는 1982년 한국대종교 총전교에 취임했고 1984년 소설 <단>의 주인공으로 세상에 알려졌다.
 

권중면 군수의 아들 권태훈 선생. 권 선생은 <단(丹)>의 저자이자 우리나라 단학의 대가이다.

▶진도읍 포구에 나타나는 동학군 도깨비 불=권태훈 선생은 5살 되던 때 아버지 권중면 군수를 따라 진도에 와서 8살이 되던 정월에 진도를 떠났다. 권태훈 선생은 자신이 어렸을 적 아버지와 어머니의 손을 잡고 진도 곳곳을 다니며 아버지와 함께 들었던 내용을 기억하고 있다. 권 선생이 93세였던 1992년 9월12일 충남 공주시 반포면 상신리 395번지에 있는 ‘봉우사상연구소’에서 가진 추석특강에서 증언한 내용은 갑오항쟁 뒤의 진도 분위기를 헤아려보는데 상당한 도움이 된다.

(다음은 권태훈 선생이 아버지 권중면 군수의 시각에서 재구성한 내용)

진도군 동헌 마루에 서면 남문 밖에 포구가 보인다. 배 닿는 데와 배들의 돛대가 빤히 보이는 것이다. 어느 날(1906년 11월 쯤) 읍내를 돌다보니까 서문 밖의 밭들이 묵어 있었다. 수행하는 자들에게 ‘저기가 왜 묵어있느냐?’물으니까 동학란 때 동학군을 800 명쯤 그곳에서 총살했는데, 아직도 뼈들이 널려있어 혹 나물을 캐러 가든지 무슨 일로 갔다가는 낮도깨비한테 홀려서 그냥 붙잡히는 사람이 있다는 설명이었다. 몇 년 전 어느 사또 부인이 홀려서 자살했는데 그곳에 갔다가 죽은 사람이 많다고 한다.

동학군이 배로 여덟 척 들어왔는데 모두 서문 밖에서 총살하여 뼈들이 그득한데 사람들이 그 도깨비들한테 홀려 죽는다고 했다. 그래서 권 군수가, 누가 어떻게 죽었던 간에 사람 뼈를 그렇게 여러 사람이 보이게 방치하는 게 좋지 않다고 말했다. 뼈들을 모두 모아 한꺼번에 큰 무덤을 세 개 세워놓고 돼지를 한 마리 잡아 ‘너희들 여기서 잘 있으라’고 위로했다.

그런지 석 달 뒤쯤에, 동헌 앞과 서문에서 배들이 오는 것이 빤히 보이는데 긴 돛대 위에 등을 수 십 개 달고 뱃놈들이 뱃소리하면서 배를 몰고 들어오는 소리가 동헌 안에서도 크게 들려왔다.

“어기어차! 어기어차!”하고 야단법석을 하여 군수가 혹시 화적들이라도 몰려오는가 하고 급령을 내려 사령 급장을 보내 알아보도록 했다. 잠시 후 늙은 아전들이 와서 보고하기를 동학군들이 배 여덟 척으로 들어온 곳에 등불이 나타났는데, 소리는 800 명이 총살된 서문 밖에서 났고 그것이 도깨비장난이지 딴 게 아니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동학군 도깨비가 남문 밖에서 한 번이라도 돌면 사또가 자리를 떠 다른 데로 간다는 것이었다.

그래서인지 아버지 권 군수도 그로부터 두 달 후에 능주로 발령이 났다. 글/박주언 진도향토사학자 정리/최혁 기자 kjhyuckchoi@hanmail.net
 

권중면 군수 부부

■권중면 군수는 누구인가?

권중면 군수는 임진왜란 당시 도원수였던 권율(權慄)의 후손이다. 호는 취음(翠陰). 구한말 관리로 서울과 지방의 관직을 두루 역임했다. 을사조약과 경술국치 이후 관직을 버리고 계룡산 자락으로 내려왔다. 상신리에 은거하면서 서당을 차려 제자를 양성하다 83세에 죽었다. 권중면 군수는 <단(丹)>의 저자이자 우리나라 단학의 대가인 봉우(鳳宇) 권태훈씨의 부친이다.

권중면은 생전에 친지를 비롯한 지인들과 많은 편지를 주고받았다. 그는 주변인들과 주고 받은 편지를 모아 편지 첩을 만들었다. 전해오는 편지첩이 <양몽구독>(梁夢舊牘), <구독부여전>(舊牘附餘全), <구독습유건>(舊牘拾遺乾)이다. 편지 첩 3종에는 편지 104점과 시 7수가 실려 있다. 종이가 귀한 탓에 신문지와 한지, 벽지 등 여러 종류 종이를 사용해 편지 첩을 만들었다.

이 편지 첩은 책미래 출판사가 지난해 <구한말 사대부들의 편지>라는 제목으로 출판하기도 했다. 고문서 전문가인 하영휘 성균관대 동아시아학술원 부교수가 번역하고 주석을 달았다. 갑신정변(1884년), 갑오농민전쟁(1894년), 갑오개혁(1894년), 을사조약(1895년), 고종 폐위(1907년), 한일병합(1910년) 등 숨 가빴던 구한말 정치상황을 엿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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