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오난’후 목숨 건진 진도 조도 주민 항일투쟁에 앞장

(65회)진도동학농민혁명의 재발견(바)

‘갑오난’후 목숨 건진 진도 조도 주민 항일투쟁에 앞장
박태주 선생 등 일제 맞서 싸우다 체포돼 목포로 압송
옥에서 나온 뒤 사재 털어 교육기관 세워 애국심 고취
사면받은 김연국, 권중면 군수 찾아와 진도서 머물기도
 

박태주선생교육공덕비
진도 조도초등학교 교정에 세워져 있는 박태주선생교육공덕비. 비가 세워졌던 1967년 당시에는 동학농민혁명은 동학난이었다. 동학에 가담한 농민들이 역적으로 취급당하던 세월이라 박태주선생이 동학참가자였다는 사실이 우회적으로 표현돼 있다. 박 선생은 동학농민전투가 모두 끝난 뒤에도 일제에 맞서 항거하다 일제에 체포됐다. 석방된 후에는 조도초등학교의 전신인 앵천학교를 세우고 후학양성에 애쓰면서 민족정기를 회복하는데 헌신했다.진도/박주언씨 제공

■조도초등학교에 세워진 박태주(朴泰澍) 선생의 비석

전남 진도군 조도면 창유리에 있는 조도초등학교 현관 앞 화단 중앙에「朴泰澍先生敎育功德碑」가 서 있다. 동학이후 지속된 항일저항운동의 단면을 볼 수 있는 비문기록이 보인다.

“서기 1861년 유토리에서 태어나신 선생은~ (중략)한일을사조약이 체결된 직후 전국을 휩쓸던 聖敎徒들의 폭거는 드디어 죄 없는 백성들의 목숨까지 앗았다. 욱 하고 북받히는 의분을 억누를 새 없어 단독으로 구민분투하시던 선생은 마침내 오라를 받고 목포로 광주로 압송되었으나 천우신조로 무사히 환향하셨다. 선생은 문득 깨달은 바 있어 사재를 던져 향학을 베푸니 때는 1908년 隆熙2년 이름하여 앵천학교(鶯遷學校)라 곧 조도초등학교 전신인 것이다.(후략)

서기 1967년 10월2일 조도초등학교 동창생 일동”

위의 비문은 을사조약 체결(1905년 11월 18일) 직후 전국적인 항일운동에 성교도들이 주축이 되었을 때 백성들까지 죽이는 일이 있었다. 박태주(1861∼1930)씨는 조도에서 단독으로 나서 싸웠다. 이 일로 체포된 그는 포승을 받고 목포, 광주에 압송되었으나 천우신조로 무사히 살아 돌아왔다. 그리고 크게 깨달은 바 있어 사재를 희사하여 학교를 세웠다는 내용이다.

박태주씨는 동학 당시 34세였고, 진도동학의 대표적 인물인 박중진(1848∼1894)과는 같은 마을 유토리에서 태어났다. 박중진은 13세 연상이었다. 박태주는 비문에 의하면 을사조약 직후 조도에서 싸우다가 체포 압송되었다. 동학진압 이후에도 일본의 침탈에 항거하는 분위기는 특히 을사조약 직후 전국적으로 거세지고 있었다.

비문의 ‘성교도’는 동학군을 위주로 한 을사조약 반대투쟁의 의병들로 볼 수 있으며, 박태주씨는 이들을 진압하려는 관군 및 협력하는 현지주민들에게 단신으로 나서 싸우다가 연행되었다고 해석할 수 있겠다. 만약 의병들에게 항거했다면 현장에서 오라를 받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살아 돌아와서 사재를 털어 학교를 세우고 집안 산소의 입비사업도 크게 지원했으며 남들을 많이 도왔다고 종친 박종휴씨(조도면 창유리)는 전한다. 특히 그는 학교에서 한문을 사용하던 때에 국문 교과서를 편찬하여 학생들을 가르치도록 했다.

박태주씨는 동학혁명으로부터 을사보호조약 직후까지 이어진 대일항쟁에서 1906년 무렵 조도에서 진압세력에 단신 항거했던 현지주민이었다고 볼 수 있다. 다만 비문에 동학관련 내용을 외면한 것은 비문을 지은 사람이 적당하게 표현한 배려였다고 해석된다.

비석을 세운 1967년 당시 동학은 농민혁명운동이 아니라 ‘동학란(東學亂)’으로 이해되고 있었다. 즉 일본군, 조선경군과 싸우는 반란세력이었던 것이다. 이보다 10년 뒤인 1976년에 발간된‘진도군지’도 같은 시각으로 기술되었다.
 

진도에 동학이 처음으로 전파된 진도군 의신면 원두리마을 전경.

■구암 김연국

동학도 사면 당시 함께 풀려났던 사람으로 1905년 손병희와 함께 동학을 천도교로 개명 창건한 구암 김연국이 있다. 보은 농민전투에 가담하여 패배 후 1901년 6월 공주감영 관군에게 붙잡혀 종신형을 받았으나 3년 7개월 만에 경성감옥에서 풀려났다. 사면을 받은 김연국이 몰래 진도에 와서 쉬어갔다. <김낙철 역사>는 이 부분에 대해 다음처럼 썼다.

‘을사(1905년) 음1월 13일’

을사년 음력 1월 13일에 구암 선생께서 진도 군아(郡衙)에 행차하셨다. 군수 권중면씨가 몰래 거처하시라고 요청한 일이었다.’

이처럼 구암 선생은 진도군수 권중면의 초청에 따랐지만 사형에 처해질 자신을 포함한 동학도들을 대거 사면으로 살려낸데 대한 사의방문이었다고 볼 수 있겠다. 김낙철의 기록에는 김연국이 진도에서 5월에 서울 평동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고 했다. 그러니까 4개월 쯤 진도군청 관아에서 몰래 머물고 간 셈이다. 그리고 3월에 김낙철 자신도 진도에 가서 김연국을 만난 내용을 적었다.

‘-나는 배를 타고 진도군청에 가서 구암 선생님을 뵈었다. 20여일을 머문 뒤에 집에 돌아오니 아내가 말하기를 “도(道)도 좋고 선생님도 응당 가서 뵙는 것이 의리에 합당하지만 딸자식 3형제를 결혼시킬 때도 지목(指目) 때문에 나타나지 않고 아들자식 하나를 혼례를 치르고서 170리가 넘는 길을 혼자 보내니 마음에 신신(薪薪)하고 남이 보기에도 무정하다고 합니다”라고 하였다. 선생님께서 이 해 5월에 서울 평동의 본댁으로 돌아가셨다.’

김낙철(1858∼1917)은 43세인 1890년 동학에 입도하여 부안 대접주로 천도교 성도사를 지냈으며, 1894년 9월 동학농민군의 재기포 이후 1917년까지의 자전적 일대기를 썼다. 경군 및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체포된 전라도 각지의 농민군지도자들의 근황이 기록되어 있어 사료적 가치가 크다. 글/박주언 진도향토사학자·정리/최혁 기자 kjhyuckchoi@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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