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마와의 거래

악마와의 거래

<문상화 광주대학교 국제언어문화학부 교수>
 

한 사내가 테이블을 사이에 놓고 악마와 마주 앉아 있다. 초췌하고 불안한 눈동자의 사내와는 달리 악마는 느긋하고 여유로운 표정이다. 테이블 위에는 열 개의 잔에 술이 차 있어서 방안에 은은한 향기마저 감돌고 있다. 이제 사내와 악마는 거래를 시작하려는 참이다.

“이 잔들의 하나에 독이 들었네. 만약 자네가 마신 잔에 문제가 없다면 자네가 이긴 셈이니 자네의 요구를 들어주겠네.” 시합에서 이길 확률은 90%나 된다는 생각에 사내는 잔 하나를 들어 단숨에 마신다. 물론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승리감에 사내는 자신의 요구사항을 악마에게 다시 한번 상기시키고 그 방을 나간다.

얼마 후 사내는 다시 악마를 찾는다. 저번보다 훨씬 세련되고 부유한 티가 흐르는 게 눈에 보인다. 아홉 개의 술잔과 사내의 좀 더 과한 요구, 그리고 긴장된 손길. 이번에도 사내에게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 긴장이 지나간 사내의 얼굴에는 탐욕이 스친다.

거래가 계속될수록 사내의 지위가 높아지고 부가 쌓이지만 권력과 부에 반비례해서 사내의 얼굴에 초조함이 눈에 띄게 쌓여간다. 자신의 원하는 것을 계속해서 얻고 있지만 얻으면 얻을수록 사내는 초조해 하는 것이 안쓰러울 뿐이다. 여덟 번의 거래가 지난 후 사내와 악마의 사이에 단 두 개의 술잔만이 남아 있다. “이번 요구는 아주 커.” 좀처럼 선택을 못하는 사내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린다. 지친 표정의 사내가 망설이고 망설인 후에 잔을 들었지만 좀처럼 마실 수가 없다. 그리고 체념과 요행이 섞인 표정으로 단숨에 잔을 마시고 고개를 숙인다. 침묵. 하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포효하는 듯한 웃음소리를 내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는 사내는 악마를 윽박지르듯 말한다. “자, 내가 말한 대로 만들어내.” 악마의 표정엔 미동도 없다.

이제 다시 사내가 악마를 찾는다. 둘 사이에는 잔이 하나 밖에 없고 그 마지막 잔에 독이 있다는 사실을 사내는 안다. 사내는 악마와의 거래에서 많은 것을 얻었지만 여전히 지치고 수척한 모습이다. “진짜 모르겠어. 내 인생이 왜 이렇게 힘든지, 당신하고 게임을 할 때마다 이겼는데 말이야. 내가 원하는 것을 다 얻었는데 왜 계속 당신을 찾게 되는 거지, 왜지?” 사내의 말에 피곤함이 묻어나는 것을 보고 악마가 비로소 표정을 풀고 말한다. “자네가 나하고의 시합에서 늘 이겼다고 생각했겠지만, 실은 자네가 마신 두 번째 잔에 독이 들어 있었다네. 내 독은 맛도 없고 느낌도 없어서 자네가 몰랐을 뿐이지. 두 번째 잔을 마신 후부터 자네는 내 수중에 들어왔다네. 자네의 요구는 내가 만드는 악일뿐이라네. 그러니 자네의 인생이 점차 피곤하고 초조해 질 수밖에!”

오래 전에 읽어서 작가의 이름도 가물가물한 이 단편소설을 생각하면 지금 우리사회가 몇 번째 잔을 마시고 있는지 궁금해진다. 개원도 하기 전에 밥그릇싸움부터 시작하는 국회의원들, 블랙박스로 내 차는 지키지만 다른 차의 주차에는 무감한 운전자들, 오로지 내 아이의 성적에만 관심이 있는 학부모와 하청업체의 일정한 이윤을 보장해주는 법이 없는 대기업, 그리고 조그만 이익에도 부나방처럼 달려드는 사람들. 이들을 생각하면 우리 사회는 게임을 시작도 하기 전에 악마의 독을 미리 마셔버린 것은 아닌지 의심이 든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 다하면 이 땅을 사랑스런 자손들에게 물려주고 퇴장해야 한다.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운명이고, 또 하기에 따라서는 자랑스러운 일일 수도 있다. 우리나라는 죽어 땅 속에 묻혀서도 자손의 만복을 기원하는 사람들이 사는 나라가 아니던가. 그런 생각을 물려받은 우리들이 자손들에게 이기심과 무배려로 가득찬 세상을 물려줄 수는 없는 법이다. 내가 추구하는 이익이 정당한지, 내가 무심코 행하는 행동이 타인에게 불편을 초래하는 것은 아닌지 살펴보야야 한다. 악마와의 거래로 행복을 얻을 수는 없는 것처럼 자신만의 이기심이 행복을 가져다 줄 수는 없는 법이다. 악마와의 거래는 시작하지 않는 것이 가장 좋고, 혹 시작했다면 즉시 거래를 중단하는 것이 맞다.

회한과 피곤함 속에서 마지막 잔을 드는 사내는 생각하기도 무섭다. “눈앞에 보이는 수많은 모습들/ 그 모두 진정이라 우겨말하면/ 어느 누가 하나가 홀로 일어나/ 아니라고 말할 사람 누가 있겠소?” 예전에 가수 김민기가 우리에게 전하던 피맺힌 절규는 아직도 유효하다. 그의 외침에서 자유롭기 위해서라도 우리의 아이들에게 물려줄 세상을 생각하고 자신만의 이기심에서 벗어나야 한다. ‘장애인 주차구역은 장애인을 위한 것’ 같은 당연한 사실을 지키는 순간, 우리 아이들에게 물려줄 세상이 훨씬 밝아질 것임을 기억하자. (smoon@gwangj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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