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해남동학농민군의 활동과 의의
동학농민군이 처절하게 최후 항전을 벌였던 해남

우슬치·대흥사 등지에서 수천 명 농민군, 일군과 맞서 싸워
日軍, 농민군 해남바닷가로 몰아넣고 잔인한 살육 작전 전개
김지하 시인, 외조부로부터 들은 해남지역 농민군 전투 증언
 

해남군 삼산면 평활리 회관
해남동학농민혁명 지도자 백장안이 태어나고 자란 곳이다. 해남동학의 중요한 유적지중 한 곳이다. 해남/김재홍 기자 kjh@namdonews.com

 

해남지역 동학농민혁명운동에 대한 독자들의 이해를 더 쉽게 하기 위해서 김형진씨가 지난해 12월 발표한 ‘해남동학농민군의 활동과 의의’ 원고를 발췌, 요약해 소개한다. 김씨는 해남·완도 일대에서 활동하고 있는 언론인이다. 김씨는 지난해 12월 12일 전남 장흥동학농민혁명기념관에서 열린 남도동학농민혁명포럼에서 이 원고를 발표했다.

남도동학농민혁명포럼은 장흥, 무안, 강진 등 8개군 향토사학자들과 동학연구자, 동학혁명에 관심이 많은 군민이 모여 지역별 동학농민혁명 전개과정과 의의 등을 나눈 모임이었다. 이 포럼은 전남지역의 동학농민혁명사를 8개군 향토사학자와 군민들이 힘을 합쳐 발굴·정리하는 민간차원의 ‘남도동학연구운동’이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컸다. <편집자 주>

 

 

 

해남지역 언론인인 김형진씨가 남도동학농민혁명포럼에서 ‘해남동학농민군의 활동과 의의’ 에 대해 발표하고 있다./장흥동학농민혁명기념관 제공

 

지난해 12월 12일 전남 장흥동학농민혁명기념관에서 열린 남도동학농민혁명포럼. 장흥, 무안, 강진등 8개군 향토사학자들과 동학연구자들이 모여 지역별 갑오항쟁 역사를 소개하고 논의했다.

■장흥 전투 이후 농민군들의 저항

동학농민혁명 중 최후의 전투라고 불리는 장흥 전투가 끝난 후, 관의 기록에서는 장흥 전투에서 밀리던 농민군들이 산과 바다로 뿔뿔히 도망치면서 무작정적인 살육만이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당시 농민군들은 관의 기록처럼 그렇게 무기력하게 무작정적인 후퇴만 감행한 것이 아니라 곳곳에서 농민군 특유의 게릴라전을 펼치며 최후의 결사 항전을 펼쳤다.

동학의 공식적인 기록에서 빠져 있는 해남 우수영 공격이라든가 우슬재 전투 또한 최후의 항전 속에서 전해오는 이야기로써, 그 마지막 점은 그저 그렇게 무기력하게 종결됐는지 아니면 불꽃을 태웠는지에 대단히 주목해야 할 부분이다. 김지하 시인이 1990년대 동아일보에 기고한 ‘고향 땅의 회상’에서 김 시인은 외가였던 산이면 상공리에 머물 때 외할아버지에게서 해남 우슬치 전투를 들었다고 했다.

김지하 시인이 외할아버지에게서 들었던 이야기는 “옛날 동학군 5천명이 싸움에 져서 도망치다 해남 우슬치를 넘었다. 고개에서 또 싸움이 붙었는데, 그만 져서 몽땅 죽었어. 그래 그 뒤로는 그 고개에서 밤마다 새야새야 파랑새야 노래가 들리고 바람이 불고 달이 뜨면 여기 저기 하얀 뼈다귀에서 피리소리가 한 없이 한없이 났더란다”고 했다.

그러면서 동학농민군의 최후의 항전지는 대흥사가 자리한 삼산면 구림리라 적고 있는데, 이렇게 역사의 잔흔들이 희미하지만 아직까지도 가슴 깊이 먹먹하게 전하고 있다는 건, 동학 농민군들의 마지막이 어떠했는지를 가늠케 해주는 대목이다.

1894년 12월 15일 펼쳐진 장흥 전투에서 농민군은 관군과 일본군에게는 큰 타격을 주지 못한 채 오히려 수백 명의 희생자만 내고 패하면서 장흥에서 남쪽 40리 지점인 고읍 대내장까지 물러섰다.

그곳에서 다시 4천∼5천 명이 집결, 계속해 결전을 벌이기로 하고 진을 쳤는데, 일본군과 경군은 이틀 뒤인 17일 오후에 다시 나타났다. <순무선봉진등록>에는 “17일…남면 40리 지점에 있는 대내장에 이르러 남쪽을 바라보니 왼쪽에는 바다가 펼쳐 있고 산천은 험준한데 어찌된 일인지 비류 4천∼5천명(농민군)이 모여 있으며 옥산 일대에도 진을 치고 있었다. 때로는 함성을 지르고 때로는 포를 쏘며 여전히 날뛰었다. 대오를 정돈하여 일제히 공격하니 적의 무리는 크게 패하여 포살자가 100여 명이요 생포자가 20여 명이나 되었다. 그 중 10여 명은 효유해서 방면하고 나머지는 포살하였다. 5리 남짓 쫓아가다가 때마침 풍설이 대작하고 황혼이 깔리며 밤이 되어 곧 돌아왔다”고 기록돼 있다.

“동학군과 일본군은 고읍천(古邑川)을 사이에 두고 3∼4시간 싸우다가 동학군이 패했다. 총소리에 놀란 주민들은 남쪽 뒷산으로 피신하자 온 산이 백산이 되었다. 일본군은 민간인에게 총격을 퍼부어 무고한 주민들이 사살되었다”는 기록도 있다.

당시 장흥과 강진 출신 동학군 지도자들은 천관산(天冠山)과 여러 산중으로 숨어들었고, 해남 지역의 지도자들과 농민군들은 일단 해남과 진도 쪽으로 피신하게 됐다.

농민군들이 뿔뿔이 흩어지자 일본군의 학살이 각지에서 이뤄졌는데, 현지 지휘관의 판단이라기 보다는 일본 공사와 관군 수뇌부가 학살방침을 결정했기 때문이다. 특히 장흥 근처에서는 인민을 협박하여 동학도에 가담시켰기 때문에 그 수가 실로 수백 명에 달했으며 그야말로 잡히면 잡히는 대로 죽임을 당해야만 했다. 일본군의 학살이 이뤄지는 동안 농민군들은 다시 전열을 가다듬으며 해남으로 속속 모여 들었다.

/최혁 기자 kjchoi@namdo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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