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 해남지역의 동학농민혁명

우슬재·해남읍·대흥사 등지에서 농민군 250여명 사망

朝日연합군, 농민군 세 꺾이자 민가 샅샅이 뒤지며 동학가담자 색출

해남·무안 농민군 갑오년 여름부터 3~4차례 우수영 점령 위해 공격

석대들 전투에서 패배한 농민군 우수영 근거지 삼으려 했으나 실패
 

호국의 성지 우수영 일대 전경
평화로운 우수영 일대 모습. 우수영은 외세의 침략에 맞서 이 강산을 지키려했던 충의가 살아 숨쉬는 곳이다. 500여년 전에는 왜에 맞서, 120여년 전에는 일 제국주의에 맞서 조선 관군과 농민들이 목숨을 바쳐 항쟁했다. /해남군 제공

■농민군들의 해남 우수영과 해남 읍성 공격(가)

동학농민혁명 당시, 해남 지역에서는 5천여 명의 동학농민군이 활동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장흥 전투가 벌어질 당시 해남 농민군들이 장흥 전투에 참전한 것은 분명하나 그 전투에 얼마나 많은 농민군들이 참전했는지 또 어느 시점에서 해남으로 후퇴해 왔는지는 정확치 않다.

장흥전투에서 패한 동학농민군들은 이 곳 저 곳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그러나 상당수 농민들은 해남으로 넘어와 다음 전투를 준비했다. 농민군들이 전열을 갖춰 항거하자 일군과 관군은 해남에 전투력을 집중했다. 그리하여 우슬재와 해남읍, 대흥사 에 있는 농민군들을 공격했다.
 

우수영과 이순신장군
전라우수영은 1440년(세종22년) 전라도 해안방어를 위해 설치됐다. 1895년(고종 32년)까지 전라우도 수군의 총지휘부로 존치됐다. 정유재란 당시에는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 장군이 명량대첩의 대승을 거둔 울돌목의 배후기지였다.

그런데 그 이전에 해남농민군들은 서남부 동학농민군들과 합세해 우수영 공격을 먼저 시도했다. 동학 농민군들이 우수영을 공격했던 이유는 크게 2가지로 보인다.

첫째는 우수영에 체포된 농민군들을 구출하기 위한 싸움이었을 것이란 견해다. 기록에서도 맨 처음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났을 때 우수영에서는 수백 명의 동학교도를 잡아 가뒀다.

당시 기록에는 교도들이 잡혀가자 해남읍 지역에서 농민군 지도자로 활동했던 김병태가 농민군을 이끌고 우수영 수사 이규항을 찾아가 담판을 짓고 잡혀 있던 동학교도들을 전원 석방시켰다고 한다.

또 하나는 우수영이 가지는 상징성이다. 우수영은 조선조 초 무안 대굴포의 수군처치사영에 있다가 세종 22년에 그 중요성이 인정되어 지금의 자리로 옮겨졌다. 그 후 세조 10년에 절도사영으로 승격 됐다.

관원은 전라우도수군절도사와 중군(中軍)이 한명씩 있어 나주, 영암, 진도, 영광, 해남 등을 속읍으로 삼았고 법성포, 군산, 고군산, 위도, 임하도, 고금도, 가리포, 금갑도, 어란포 등을 속진으로 거느렸을 만큼 규모가 큰 곳이다. 또한 본영과 속음진의 배 130척을 관할했으며 복파관과 망해루 등의 정자가 있어 해상을 관망하는 기지로 삼고 있었다.

농민군들은 우수영 자체가 전략적 요충지로써 방호벽이 잘 구축돼 있어 일본군·관군과 일전을 벌이기로 용이할 것으로 판단했을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 관을 점령해 더 많은 농민들의 참여를 이끌어 내기 위한 일환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기록에는 혁명 당시 해남 동학농민군들을 지휘했던 지도자들이 등장한다. 해남 서부 지역을 이끌던 황산면 남리 출신의 대접주 김신영과 해남 동부 지역을 이끌던 삼산면의 접주 백장안. 그리고 교장 윤종무 등이다.

해남지역의 동학전투는 관군이 농민군의 움직임을 모두 간파하고 복합적인 전략을 구사함으로써 완벽한 승리를 거뒀다. 농민군은 관군과 일군에 대한 정보 없이 수세적인 전투를 치름에 따라 전투에서 패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글/해남향토사학자 김형진

정리/최혁 기자 kjchoi@namdonews.com
 

전라우수영 城址
전라우수영은 우리나라 수군 진성 중 가장 큰 규모였다. 영내에 민가 620호가 있었다. 수군병력도 1천85명에 달했다. 우수영 성 복원을 위한 정부의 지원이 절실하다.

■전라우수영 전투지

동학농민혁명 당시 해남 지역 농민군과 일본군 및 관군 사이에 전투가 벌어졌던 곳이다. 또한 해남과 진도 지역에서 체포된 많은 농민군들이 이곳에서 처형돼 목숨을 잃었다. 해남군 <도인경과내력>에 따르면 전주화약 이후 6월부터 7월 사이 해남으로 들어왔거나 해남을 거쳐 다른 지역으로 옮겨간 농민군 수는 모두 4천700여명이다.

농민군들이 해남읍성에 들어올 때에 각각 창과 총, 칼을 가지고 들어왔다. 때로는 포를 쏘기도 했다. 그 기세가 매우 위협적이어서 모두들 두려워했다고 한다. 음식접대는 각 민가와 시장가의 술집에서 차례를 나눠 담당했다.

농민군 접대에 들어간 비용은 모두 6천여 냥으로 이 가운데 1천 냥은 관아에서 부담했다. 나머지는 집강소에서 각 면의 부자들에게 배정해 처리한 것으로 알려졌다. 1894년 여름부터 가을까지 해남과 무안의 농민군은 3~4회에 걸쳐 우수영을 공격했다.

우수사는 진도 등지의 수성군과 협력해 농민군의 공격을 막아냈으나 11월에는 강진병영성에 지원을 요청할 정도로 위태로운 지경에 처하기도 했다. 장흥 석대들에서 패한 농민군이 해남으로 쫓겨 오자 일본군과 관군의 토벌작전은 해남을 중심으로 해 이뤄졌다.

좌선봉진군은 1894년 12월 17일에 해남 우수영에 도착했으며 통위영병도 12월 19일에는 해남읍에 도착했다. 농민군들은 해남읍성을 공격하기 위해 집결했다가 12월 19일 통위영병과의 전투에서 8~9명의 전사자가 생기자 해산했다.

일본군과 관군은 농민군의 세가 한풀 꺾이자 대대적인 색출작업에 들어갔다. 일본군들은 동학농민항쟁 가담자들은 몰살시킨다는 내부방침을 정하고 동학군 지도자들은 물론 일반 농민들까지 무자비하게 처형했다. 이 결과 해남지역에서는 공식적인 관군기록에서만 250여명의 농민군이 처형된 것으로 나온다. 정리/최혁 기자 kjchoi@namdo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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