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민군 우슬재 등 해남읍성 길목 지키며 기습준비

최혁 남도일보 주필의 동학유적지-(72) 해남지역의 동학농민혁명

농민군 우슬재 등 해남읍성 길목 지키며 기습준비

1천여명 농민군 해남읍성 공격하지 않고 하루 허비

해남읍 진입 여러 길목 지키고 야음 틈타서 공격 준비

관군 대포사격으로 공포감 높인 뒤 지역별로 격파작전
 

1978년의 해남군청 모습
동학농민혁명 당시 전남서부지역 농민군은 우수영과 해남읍성을 공격하려 했다. 지금의 해남군청에는 해남현 관아가 들어서 있었고 관아를 중심으로 해 해남읍성이 자리하고 있었다. /해남군 제공

■농민군들의 해남 읍성 공격(다)

해남지역 동학농민군과 장흥 석대들 전투에 패한 뒤 해남으로 몸을 피한 농민군들은 우수영을 공격하려 했다. 그러나 여의치 않자 계획을 바꿔 해남읍성을 함락시키로 계획을 바꿨다. 1894년 12월18일(음) 1천여명의 농민군이 해남읍성 주변에 집결했다.

해남읍성은 현재 해남군청 뒷담을 시작으로 서쪽의 서초등학교 담~토담 성모병원터~국민은행 구 중앙극장 터~보훈회관을 잇는 평지에 축조된 성이다. 지금은 흔적만 남아 있다. 임진왜란 이전에 발생했던 달량진 사변 당시 현감이었던 변협이 지역민들과 왜구의 침입을 막아낸 성으로도 유명하다.

해남읍성 부근에 몰려든 해남 농민군과 전남 서남부 농민군들은 읍성공격에 나서지 않았다. 이는 각 지역에서 해남으로 오고 있는 농민군들과 합류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이 같은 기다림은 또 한 번의 실책이었다. 농민군들은 언제 공격해도 해남읍성을 쉽게 함락시킬 수 있다고 여긴 듯싶다. 성이 높지 않고 관군의 수도 별로 되지 않기에 지키고 있는 해남읍성을 무너뜨리는 것은 시간문제라 생각한 것으로 여겨진다.
 

1992년 해남군청 내부 모습
해남군청 안에 있는 노송. 이 자리가 예전에 관아터였음을 알려주고 있다.

농민군은 해남읍성을 지키고 있는 관군보다는 강력한 무기로 무장한 일본군과 관군이 해남으로 들어와 자신들을 공격하는 것을 우선 막아야한다고 판단했다 . 그래서 일본군과 관군을 해남읍성으로 들어오지 못하는데 주력했다. 농민군 지도자들은 대낮에 조일연합군을 맞아 싸우면 승산이 없다고 판단했다. 해남읍성으로 들어오는 여러 길목들을 지키고 있다가 한밤중에 기습작전을 펼치면 승산이 있을 것이라 생각한 것으로 보인다.

당시 농민군들의 방어 및 기습을 위한 인원배치를 추정해보면 주력 부대는 해남읍성에 부근에 있었다. 서쪽 진입에 대한 방어책이다. 또 관군과 일본군이 동쪽에서 해남읍성으로 진입하는 것을 막기 위해 옥천으로 넘어가는 우슬재 부근에 상당한 병력을 분산 배치시킨 것으로 보인다.

우슬재 고개를 중심으로 금강산 청룡 부근에 병력을 배치했던 것은 당시 해남읍성으로 들어오기 위해서는 옥천면 영춘에서 삼산면 상가리, 계동, 그리고 해남읍 연동을 지나 신안리를 거쳐야 해남읍(현 평동)으로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관군과 일본군은 이 같은 농민군의 배치 및 기습의도를 간파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조일연합군은 병력을 2~3개로 나눠 일부는 우슬재를 공략케 하고, 해남 마산면에서 해남읍으로 들어오는 아침재나 해남읍 학동 부근으로 병력을 진입시켜 해남읍성 진입을 시도했다. 이런 상황 등을 감안, 유추해 볼 때 해남읍으로 진출한 관군과 일본군은 어느 정도 거리를 둔 상태에서 포 공격을 실시, 농민군들에게는 공포감을 준 뒤 구역별 부대를 투입해 농민군 섬멸작전을 펼친 것으로 추정된다.

농민군과 조일연합군 사이에 본격적인 전투가 벌어진 것은 1894년 음력 12월 19일 새벽녘이었다. ‘순무선봉진등록’ 등에는 당시 상황이 이렇게 기록돼 있다.

“12월 18일 밤 축시(2∼3시 사이)경에 행군하여 해남 현 근경에 이르러 적정을 탐문하여 보니 동학군 1천여명이 성 외곽에 집결해 있었다. 2개 소대를 둘로 나누어 접근시키자 그들이 수 삼차 방포하며 저항했다. 경군이 일제히 응사하며 공격하자 적도들은 사방으로 흩어져 달아났으며 8∼9명이 사살되었다”고 전했다.

동학농민군이 해남읍성을 하루만 더 빨리 공격했더라면 해남읍성을 수중에 넣었을 것으로 보인다. 설령 농민군이 해남읍성을 함락시켰다하더라도 일본군의 강력한 화력과 전술 앞에 다시 무너지는 것은 시간문제였을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농민군들이 조일연합군 해남진입 가능성을 심각하게 여기지 않고 우수영 군사들에게 방어할 수 있는 시간을 주고, 또 해남읍성 공격 역시 머뭇거린 것은 매우 아쉬운 대목이다.

농민군이 우수영과 해남읍성을 장악했더라면 후반부 농민군들의 저항은 좀 더 조직적이고 장기적으로 갈 수 있었을 것이다. 석대들 전투 패배에도 불구하고 해남으로 집결해 항쟁을 펼쳤던 농민군들의 기개를 또 한 번 확인할 수 있었을 것이다.
 

동학농민군이 많았던 해남 별진역참 자리. 해남군 계곡면 사무소등이 들어서 있다. 당시 별진역참 동학농민들은 해남읍성을 공격하는 등 남도전투에 매우 적극적으로 가담했다.

■농민군 근거지였던 별진역터

전남 해남군 계곡면 성진에 있는 별진역은 동학농민혁명 당시 별진역참이 있었던 곳이다. 별진역은 진도 삼지원과 문내면 우수영, 목장이 있었던 화원면을 가기위해 이용했던 역이다. 마산면 화내리를 거쳐 육일시로 이어지는 도로를 이용했었다고 한다.

별진역은 현 계곡면사무소와 농협 건물 일대이다. 이곳에는 많은 비석들이 남아 있어 비석등이라고도 불린다. 계곡 성진에서 광주 방면으로 조금 가다보면 계곡을 사이에 두고 옛 약수터가 있다. 이곳 약수터가 역이 있을 당시 말에게 물을 먹였던 샘인 마정이다. 사람들은 이곳을 말삼정이라 부르고 있다.

별진역에는 동학교도들이 많이 있었다. 별진역참 동학농민들은 해남읍성을 공격하는 등 남도전투에 매우 적극적으로 가담했다. 활발하게 움직였다. ‘강재일사’ 갑오 11월6일자 기록에 따르면 농민군의 공격을 받자 전라좌수사가 강진병영에 구원을 요청하고 병영수성군이 해남현 별진역에까지 출동한 내용이 있다.

이날 전라병영 수성군은 별진역에 살고 있던 방모 교장 등 5명을 체포했다. 관군은 방모 교장을 병영 진내에서 처형하고 나머지는 곤장을 때린 뒤 옥에 가뒀다. 12월22일에는 일본군 후비보병 제19대대 제1중대가 별진역에 주둔하면서 농민군을 처형하기도 했다. 일본군은 별진역을 거쳐 해남 우수영에 진출, 250명 이상의 농민군을 처형한 뒤 1895년 음력 1월9일 별진역을 거쳐 나주로 올라갔다.

글/최혁 주필 kjhyuckchoi@hanmail.net 자료제공/김형진 완도신문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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