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 해남지역의 동학농민혁명

이규태 통위영군 해남 곳곳 뒤져 농민군 체포·처형

日軍 “후환을 없애기 위해 反日세력 최대한 많이 죽여라”

관군과 수성군 토벌·색출 과정에서 250여명 농민군 살육

日, 조선 민심 얻기 위해 체포농민군 처형은 관군에 맡겨
 

해남관아터에 들어서있는 해남군청
1992년에 촬영된 해남군청 모습. 우수영과 해남읍성을 공격하려 했던 농민군들은 일본군과 통위영 부대가 해남으로 들어옴에 대흥사등으로 피신해 최후의 항전을 준비했다. /해남군 제공
해남읍 구교리 일대 2005년 모습
장흥 석대들에서 패배한 농민군 상당수는 해남으로 들어와 해남읍성을 공격, 최후의 근거지로 삼으려 했다. 그러나 이는 결국 실패로 돌아갔다. 일본군은 1984년음력 12월 22일 해남 별진역에 머물면서 250여명 이상의 농민군을 처형했다.

■해남지역 농민군의 최후(라)

해남읍으로 진입해 오는 관군과 일본군을 막기 위해 우슬재를 지키고 있던 동학농민군과 해남읍성을 공격하기 위해 성 주변에 집결해 있던 농민군들은 1894년 음력12월 18일 밤 관군의 공격을 받고 와해됐다. 우세한 화력을 감당할 수 없었던 것이다. 관군과의 전투에서 이날 8~9명의 농민군이 목숨을 잃었다.

농민군들은 뿔뿔이 흩어져 제각기 살길을 찾아야 했다. 상당수 농민군들은 몸을 숨기기 위해 고향으로 향했다. 그러나 해남농민군과 일부 타 지역 농민군들은 두륜산으로 찾아들었다. 비교적 산세가 험한 두류산을 근거지로 삼아 관군·일본군에 맞서 싸우기 위해서였다.

일본군 수뇌부는 장흥 석대들 전투에서 패한 농민군 상당수가 해남으로 들어갔다는 정보에 따라 관군과 일본군 각 부대를 해남으로 진입시켰다. 이규태가 지휘하는 좌선봉진군은 1894년 음력 12월 17일 해남우수영에 도착했다. 12월19일에는 경군인 통위영병도 해남읍에 도착했다.

일본군 후비보병 제 19대대 제1중대(중대장 松木正保)등 일본군은 21일과 22일 해남으로 들어왔다. 관군과 일본군은 20일부터 동학군 색출에 들어가 잔인한 살육전을 시작했다. 모든 가옥을 뒤져 수상한 농민이 있으면 즉결 처분했다. 일본군이 남긴 기록에 따르면 250여명의 농민군이 이때 죽임을 당했다.

동학농민군을 이끌던 해남지역 동학지도자를 비롯 무안 배상옥대접주가 체포돼 처형당한 것도 이때다. 일본군은 관군과 수성군을 앞세워 동학농민군을 색출했다. 해남농민군의 모사였던 전유희(全由禧)와 남리역 대접주 김신영이 삼촌면(三寸面, 현 三山面)에서 지방민에게 체포됐다.

접주 윤주헌과 교수(敎授) 김동, 박인생도 체포됐다. 일본군은 김신영과 윤주헌은 일단 해남읍에 가두었으나 김동과 박인생은 즉시 총살했다. 또 같은 날인 22일에 이도면(梨道面) 접주 김순오(金順五)와 교장 박익현(朴益賢), 집강 이은좌(李銀佐), 별장 박사인(朴士仁), 교수 김하진(金夏振) 등 5명도 체포됐다.

이후 해남의 대표적 지도자인 대접주 김춘두와 김춘인(金春仁) 형제가 체포됐다. 김춘두는 해남 일해리(一海里, 현 南海邑 海里)출신으로 해남의 대표적인 대접주였다. 일본군은 중요인물인 김춘두를 나주 대대로 이송했다가 총살시켰다. 김춘인은 해남옥에 가두었다가 처형했다.

그리고 25일에는 해남 녹산면(祿山面, 鹿山面) 수성군이 완도로 출동해 군외면 불목리(佛目里)에서 해남 삼촌면 대접주 백장안(白長安)을 밤중에 기습, 체포해 해남으로 끌고 와 28일에 처형했다. 백장안은 삼촌면(현 三山面) 구림리(九林里)에서 태어나 무과에 급제한 한량으로 1893년에 동학에 입도해 삼산과 비곡, 현산, 해남읍 남동리 지역의 접주로 활동하던 인물이었다.

29일에는 현산면(縣山面)에서 접사 장극서(張克瑞), 교수 이중호(李重鎬), 도집 임제환(林濟煥), 집강 최원규(崔元圭) 등이 붙잡혔다. 녹산 산림동 접주인 김경재(金京在)는 28일 총살됐고 록산 산림동 접사 박흥녕(朴興寧)과 해남접사 강준호(姜準浩)도 이날 처형됐다.

해남지역에 들어와 동학군 색출을 담당했던 부대는 이규태가 지휘하는 좌선봉진군(통위영 대대)이었다. 이두황의 우선봉진군은 1894년 음력 12월 20일 장흥부에 입성한 뒤 장흥지역 농민군 잔당을 색출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이규태는 남소사랑(南小四郞)의 명령에 따라 200명의 부대를 이끌고 12월 10일 나주를 출발 무안-목포-주룡포-남리역을 거쳐 해남으로 들어왔다.

이두황은 12월 23일 남소사랑(南小四郞)으로부터 “해남지방은 제1중대와 제3중대와 더불어 교대중대가 이미 파견된 바 귀관은 장흥에 계속 머물며 부근지역의 동학 잔당을 체포하여 죽일 것”이란 지휘서신을 받고 다음해 1월 8일까지 19일간 장흥에서 머물려 농민군 학살과 민가약탈을 자행했다.

일본군은 동학농민군을 토벌할 때 잘 훈련되고, 최신식무기를 갖춘 후비보병을 전투에 투입하여 농민군의 기세를 꺽은 뒤 잔당 토벌과 수색, 체포, 처형 등은 대부분 경군이나 수성군에게 넘겼다. 그것은 민심을 잃지 않기 위해서였다. 일본군은 약탈을 하지 않는 한편 조선관군의 약탈을 막아 민심을 얻으려 했다.

그 대신 일본군은 관군을 통해 동학농민군들을 샅샅이 찾아내 잔인하게 처형토록 했다. 일본에 반대하는 세력, 특히 동학군을 뿌리까지 없애 후환을 남기지 않기 위해서였다. 인천의 이등(伊藤) 사령관과 정상형(井上馨) 일본공사의 지시에 따라 남소사랑(南小四郞)은 이규태와 이두황에게 동학농민군을 최대한 많이 죽이라는 명령을 이미 내린 상태였다.
/최혁 기자 kjchoi@namdonews.com

/해남 김재홍 기자 kjh@namdonews.com

자료제공/김형진 완도신문 편집국장
 

해남우슬재
농민군은 우슬재에 진을 치고 해남으로 들어오는 조선관군과 일본군을 막으려 했다. 그러나 화력이 우세한 조일연합군의 공격을 받아 다수의 사망자를 내고 대흥사 일대로 물러났다. /사진/정유진 기자 jyj@namdo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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