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민군의 최후 저항지 두륜산과 대흥사(마)

(74) 해남지역의 동학농민혁명
우슬재에서 밀린 농민군 두륜산에서 저항하다 최후
대흥사입구 구림에서 농민군 5천명 몰살, 구전으로 전해와
농민군 원혼들, 배고픈 모습으로 방문객 꿈에서 나타나기도
김지하 시인 외조부 동학농민군 최후저항지로 두륜산 지목
 

1991년 대흥사 정문 모습.
해남읍성을 공격하기 전 조일연합군의 공격을 받은 농민군은 두륜산으로 후퇴했다. 험한 산세를 이용해 싸우려던 농민군들은 결국 관군에게 모두 소탕당했다./해남군 제공
두륜산 전경과 해남 대흥사.
일본군은 대흥사 스님들이 농민군들을 숨겨주자 대흥사를 불지르겠다고 협박하면서 대흥사 일대에서 농민군들을 색출하기도 했다./김병구 사진

■농민군의 최후 저항지 두륜산과 대흥사(마)

두륜산은 대저 우리나라의 큰 산에 비하면 올망졸망한 작은 산에 불과하지만, 두륜산 곳곳에는 수령이 300~400년이 넘은 수목들이 많아 작은 산세에도 울창함을 자랑한다. 또, 산세와 계곡이 잘 어우러져 은폐 엄폐가 용이하고, 지리에도 밝다면 두륜산은 게릴라전을 펼치기엔 최적의 장소다.

그렇게 두륜산을 무대로 농민군과 수성군 사이에서 하루 종일 쫓고 쫓기는 공방전이 펼쳐진 가운데, 일본군과 관군이 대거 입성하자 농민군의 전세는 점점 불리해져 갔다.

그러한 전세 속에서 22일에는 산이면 농민군들에게 참사가 일어났다. 당시 산이면 동학농민군의 지도부였던 접주 김순오, 교장 박익현, 집강 이은좌, 별장 박사인, 교수 김하진이 체포됐고 많은 농민들이 처참하게 죽어갔다.

두륜산 전투가 펼쳐지는 처음만 해도 지리적 잇점 때문에 게릴라전을 펼치며 어느 정도 대등한 전력을 보였지만, 시간이 흐르며 일본군과 관군의 투입 또한 점차 늘어나자 해남의 대표적 지도자들이 연달아 체포 되거나 사살 됐다.

대접주 김춘두와 김춘인 형제, 화산면의 김만국, 박헌철 등이 일본군에 손에 넘어갔다. 김춘두는 해남의 대표적인 대접주였기에 일본군이 나주 대대에 이송하였다가 포살했고, 김춘인은 해남옥에 가두었다가 처형 당했다.

대한민국의 대표 명품 숲길 대흥사 숲길, 대흥사 매표소에서 대흥사로 들어가는 장장 4㎞에 이르는 이 숲길. 대흥사를 다녀간 많은 이들은 다른 건 몰라도 갖가지 나무로 터널을 이룬 이 명품 숲길만은 쉽사리 잊지 못한다고 전한다.

대흥사를 오르는 동안 산 골짜기를 따라 아름들이 서 있는 갖가지 고목들과 맑은 시냇가, 하늘을 뒤덮은 나뭇가지를 따라 고개를 한껏 젖히고 그 푸른 하늘을 이고 있는 곳을 따라 가노라면 남도의 정취와 남도의 청량감을 그대로 만끽할 수 있다.

그렇게 숲길의 그윽한 정취에 젖다보면 번잡한 세상사는 티끌처럼 소소해지고 어느 덧 몸은 피안으로 들어서는데, 피안교를 건너면 목장승과 일주문이 길손을 맞이하고 일주문에 들어서면서 길 오른편에는 낮은 돌담으로 둘러싸인 부도밭. 이곳에는 서산대사를 비롯해 대흥사에서 배출한 역대 종사와 강사들의 부도 50여 기와 부도비 14기가 모여 있는데, 절의 규모와 역사가 예사롭지 않음을 짐작케 하는 유물들이다. 그리고 부도밭을 지나 다시 숲길을 두어 굽이 돌아가면 대흥사다.

대흥사. 대흥사는 대한민국 불교문화를 대표하는 산실이지만, 특히나 이곳은 지역 항일의 역사와 관련해 굵직 굵직한 역사적 사건들이 스며 있다. 임진왜란 때는 서산대사가 조선 승병의 총 본영(총사령부)을 설치해 왜국과 맞섰고, 1909년 일제강점기에는 대흥사 심적암 일원에서 일본군의 ‘남한 대토벌작전’ 당시 땅끝으로 밀려온 의병 65명이 일본군 헌병대와 치열한 전투를 벌이다 순직했던 곳이며, 1933년에는 호남인들이 주도해 온 항일 운동 단체인 ‘전남 협의회’ 3차 회의가 심적암에서 열릴 정도로 항일과 관련해 의미로운 곳이다.

이렇듯 서산대사의 의발이 대흥사로 이어지고, 동학농민혁명의 마지막 투쟁과 일제강점기의 항일 의병투쟁, 그리고 6‘25 때도 많은 지역민들이 이곳에서 몸을 숨겼던 이유는 뛰어난 산세와 깊기 때문이다. 일찍이 서산대사는 두륜산을 3재 환란을 피할 수 있는 곳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김지하 시인
김지하 시인은 외할아버지로부터 해남 대흥사 일대에서 수많은 동학농민군들이 죽음을 당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증언했다.

■김지하 시인의 증언

현재 동학농민혁명사의 끝머리에서 동학농민군들이 대흥사 두륜산에서 그 마지막을 다했다는 공식 기록은 전해오고 있지 않다. 다만 김지하 시인이 1991년 동아일보에 기고했던 글에는 동학혁명 당시 농민군 지도부 대부분이 이곳 삼산면에서 붙잡혀 처형 됐다는 내용이 등장한다.

김지하 시인은 당시 술회에서 외가였던 해남 산이 상공리를 방문했을 때 외할아버지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옛날 동학군 5천명이 싸움에 져서 도망치다 해남 우슬치를 넘어와 우슬치 고개에서 싸움이 붙어 그만 져서 몽땅 죽었고, 그리해 우슬치 고개에서는 밤마다 새야새야 파랑새야 노래가 들리고 바람이 불고 달이 뜨면 여기저기 하얀 뼈다귀에서 피리소리 피리소리가 한 없이 한없이 났는데, 진짜 동학군 5천명이 전멸한 곳은 대흥사 입구 구림이지야”

1985년 김 시인은 민중사상기행을 쓰기 위해 지인이던 장길산의 저자 황석영 작가와 해남에 잠깐 들렸다. 이때에도 동학군 최후의 결전 장소가 삼산 구림리였다는 것을 들었다고 했다.

당시 김지하 시인은 해남 친구들(우록 김봉호와 김광호 씨등으로 추정)이 자신들을 대접한다 해서 밤중 에 대흥사입구 구림에 있던 한 요리 집의 방에 앉아 마음이 영 불편했다고 한다. 마음이 춥고 떨리고 슬프고 무겁고 숱한 바늘이 몸을 콕콕 찌르는 듯 편치 않았다.

그때 건너편에 앉아있던 황석영 씨가 신경이 날카로워진 얼굴로 “이집 참 이상한데. 영 맘에 안 들어” “꼭 무덤같지?”라도 말했다. 김지하 시인이 “맞소”라고 말하자 황석영시인이 “자 나가세”하며 앞장서 함께 자리를 털고 나왔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해남친구들에게 이 집 자리가 예전에 어떤 곳이냐고 물었더니 “동학군 5천명이 몰살한 자리아닙니까”라고 말하더란다. 그러며 대흥사와 땅 끝, 그리고 해남읍내세 길이 갈라지는 병풍산 밑 골짜기, 그곳에서 동학군이 조선관군과 일본군에 포위돼 모두 섬멸 당했다고 전했다.

지금도 거기 누가 텐트라도 치는 날이면 꼭 한밤중, 꿈에 누더기 동학군들이 나타나 배고프다 울며 하소연하고 코펠이나 배낭에 든 음식이 싹 없어진다는 말을 전했다. 그러며 죽음보다 더 무서운 굶주림! 실패한 개벽의 꿈! 어디 해남뿐이랴! 아름답고 풍요한 대지 곳곳에 동학의 그 큰 뜻과 슬픈 역사는 아직 발굴되지도 못한 채 그대로 묻혀있다고 안타까움을 토로했다.

/최혁 기자 kjchoi@namdonews.com

해남/김재홍 기자 kjh@namdonews.com

자료제공/김형진 완도신문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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