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조정 동학농민군 2차 기포하자 무력진압 결정

(75)조선 관군과 일본군의 동학농민군 진압
조선조정 동학농민군 2차 기포하자 무력진압 결정
도순무영 설치하고 장위영·통위영·경리청·교도중대 등 동원
좌선봉장 이규태 우선봉장 이두황 임명 경기지역부터 진압
日 19대대 인천도착 후 南小四郞에 朝日연합군 지휘권 넘겨
 

구한말 별기군 모습
한말신식군대
일본군 장교들이 훈련시킨 신식군대는 동학농민혁명 당시 농민군을 토벌하는데 동원됐다.
구한말 별기군 훈련 모습
일본은 구한말 군인들을 해산하는 대신 새로운 부대를 만들어 일본군이 훈련시켰다.

 

■조선의 진압부대 편성

갑오년 개화파 정부는 1894년(음력) 9월 10일 동학도가 경기도 안성과 죽산 지방에서 기포하자 관군을 동원, 무력진압에 나설 것을 결정한다. 9월 14일 동학당 토벌계획을 수립한데 이어 9월 14일 처음으로 전국의 동학농민군에 대해 무력을 쓰는 것(用武)을 결정한다. 9월 21일에는 호위부장 신정희(申正熙)를 순무사(巡撫使)로 임명하고 군영을 설치해 여러 군대를 통솔토록 했다.

9월 26일에는 장위영(壯衛營) 정령(正領) 이규태(李圭泰) 등을 선발하고 10월 2일에는 왕사(王師;왕의 근위부대)를 야전에서 지휘하는 선봉장으로 임명한다. 또 통위영 부대를 이규태의 중군(中軍)격으로 삼아 9월 10일 선발된 죽산부사 이두황이 지휘하는 장위영 부대와 안성군수 성하영이 지휘하는 경리청 부대, 이진호가 지휘하는 교도중대(敎導中隊)까지 도순무영의 신정희의 지휘 하에 둔다.

선봉장 이규태는 10월 6일부터 현지로 내려가 동학당을 토벌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이규태는 일본군 19대대장 미나미 소시로(南小四郞)로부터 불신을 받는다. 미나미 대좌는 명령을 충실히 이행하는 이두황을 신임하게 됐고 그를 수족으로 부린다. 미나미 대좌는 조선조정에 요구해 왕사(王師) 부대를 좌선봉(이규태)과 우선봉으로 나누고 이두황을 11월 26일 양호우선봉장으로 승진시킨다.

미나미가 12월 2일 일본공사에 올린 문서에는 “동학당 토벌선봉군대장 이규태는 열열이 동학당에 가담한 사람이며, 모든 처사가 애매모호하고, 지휘관의 명령을 왜곡하여 이제까지 한 번도 전투일선에 나선 적이 없다고 합니다. 또 전투 중에 자기 편리대로 숙소에 돌아오는 등 제멋대로 일을 처리하여 군대에서는 해로운 인물이므로, 대장 이규태를 소환하시어 빨리 처분해 주시기 바랍니다”라는 내용이 있다. 평소 미나미가 이규태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동학농민군 토벌을 위해 동원된 군대는 왕사(王師)인 장위영(壯衛營)과 통위영(統衛營)과 북한산성 수비대인 경리청(經理廳)이다. 각 부대마다 700~800명씩의 병력이 차출됐다. 장흥사학자 위의환선생은 장위영, 통위영, 경리청은 별도로 지원부대인 마필관리, 초군(樵軍), 취사, 잡색 등까지 합하면 대략 각 부대마다 1천여 명 정도의 병력이 차출된 것으로 보고 있다.

청주의 진남병(鎭南兵)과 강화병(江華兵)은 충청도 홍주 등의 전투에 참여하나 구식 무기를 사용하고 있었기에 결국 철수지시를 받는다. 일본군이 훈련시킨 교도중대(敎導中隊: 중대장 이진호)는 일본군 장교와 하사관 약간 명이 포함된 혼성부대다. 이 부대는 외형적으로는 이규태의 지휘를 받지만 실질적으로는 일본군의 진로를 여는 일본군 전위부대 임무를 수행했으며 화력과 전력이 막강했다.

관군들이 동학농민군을 어떻게 토벌했는지에 대해서는 남도의 동학농민혁명 유적지 77회부터 자세히 소개할 계획이다. 관군의 장흥동학농민혁명 토벌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 이두황이 작성한 <양호우선봉일기>이다. 우선봉일기는 이두황이 죽산부사로 임명되는 갑오년(1894년) 9월 10일부터 우선봉장 임무를 마치는 을미년(1895년) 2월 18일까지의 군사작전과 전투내용을 일목요연하게 일기형식으로 정리한 것이다.

이두황은 1895년 10월 8일 을미사변에 참여, 이후 체포령이 내려지자 일본으로 피신한다. 12년 동안 일본에서 망명생활을 하다가 1907년 이등박문(伊藤博文)의 주선으로 귀국하게 된다. 이후 전북관찰사로 임명되는 등 친일파로 승승장구하며 호화로운 삶을 산다. 이두황이 동학농민군을 토벌하면서 남긴 것이 우선봉일기로 훗날 금속활자로 인쇄한 것이 오늘날의 <우선봉일기>이다.

한편 이규태가 지휘하는 선봉진의 일기 <순무선봉진일기>는 9월 21일부터 시작한다. 장흥을 비롯한 전남지역의 농민군 토벌기록은 우선봉일기에 많이 등장한다. 우선봉군이 전남지역 대부분을 무대로 농민군 진압에 나섰기 때문이다.

도순무영 산하의 조선관군은 10월초까지는 독립적인 작전을 펼친다. 그러나 1894년 음력 10월 9일(양력: 11월 6일) 남소사랑(南小四郞) 대대장이 지휘하는 일본의 독립 후비보병 19대대가 인천에 도착하면서 일본군의 지휘를 받는다. 일본공사 정상형(井上馨)은 외무대신 김윤식에게 동학당 토벌에 대한 모든 권한을 일본에 넘길 것을 요구하고 조선조정은 이를 수용한다.

정상형은 일본의 남부병참감(동학당토벌 일본군총사령관) 이등우의(伊藤祐義) 중좌가 10월 9일 작성한 ‘南站발 甲174호: 동학당 정벌계획과 진무사(鎭撫使) 및 조선군파견요청’을 검토한 후 김윤식에게 ‘동학당 조초(助剿)계획 및 예비사항의 통고’를 보낸다. 동학군을 진압할 군사력이 부족하고 일본의 요구를 물리칠 힘도 없는 조정은 조선백성의 목숨을 일본에 맡기고 마는 것이다.

/최혁 기자 kjchoi@namdonews.com

자료제공/장흥사학자 위의환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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