록키산맥 탄광노동자들 보다 못한 장관들

록키산맥 탄광노동자들 보다 못한 장관들

<최혁 남도일보 주필>
 

기자가 전역 후 사회생활을 시작한 것은 지난 1984년부터이다. S그룹에 입사해 4년여를 근무했고 1988년부터는 지역신문기자로 일했다. 당시 기자생활은 재미있었다. 비록 지역신문 기자였지만 어줍은 위세도 부릴 수 있었다. 교통신호를 위반해 걸려도 기자증을 보여주면 대개는 딱지를 떼지 않고 그냥 보내줬다. 전반적인 사회분위기는 기자를 잘 대해주는 것이었다. 물론 기자가 잘나서가 아니었다. 기자에게 밉보이면 뒤탈이 생길지 모른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시장·군수를 도지사가 임명하던 관선 시대였던 탓에 행정기관을 출입할 때는 ‘같잖은 위세’를 부리기도 했다. 시장·군수로 나가고 싶은 실·국장들은 수시로 기자실을 찾아와 밥을 샀다. 지방을 찾은 국무총리나 장관들도 기자실을 찾아와 몇 마디 나눈 뒤에는 으레 제법 두툼한 촌지를 두고 갔던 세월이니, 기자들의 호가호위(狐假虎威)가 어떠했으리라는 것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다른 동료기자들은 그렇지 않았지만, 기자는 올챙이 분수를 모르고 천방지축 나댔다.

언론인이랍시고 까불어대던 세월은 2000년에 끝이 났다. 당시 기자는 미국 모 대학에 연구원으로 근무하면서 1900년대 초 록키산맥 일대에서 생활했던 조선인 노동자들의 삶을 연구하고 있었다. 10년 동안 유타주를 비롯 와이오밍주, 네바다 주, 콜로라도주, 뉴멕시코주, 캘리포니아주를 헤매며 선인(先人)들의 자취를 찾았다. 자료가 흔치 않아 어려웠던 작업이었지만 미국 곳곳에서 농장 일꾼으로, 탄광 광부로, 철도노동자로 일하던 조상들의 흔적을 찾을 수 있었다.

1905년에서 1910년 사이 조선인 노동자가 미국 땅에서 받았던 하루 일당은 1달러50센트 내외였다. 그런데 공립신보와 신한민보 등 당시 캘리포니아 일대 한인들이 발행했던 신문에 따르면 대부분의 조선인 노동자들은 매일 50센트 정도를 떼어내 이를 모아 조국에 보냈다. 1910년 이후에는 상해임시정부에 독립운동자금으로 보냈다. 조선에 가뭄이 들거나 홍수가 나면 대개 20~30 달러를 성금으로 보내곤 했다. 지금으로 치면 거의 한달 봉급을 보낸 것이다.

또 와이오밍주 일대 탄광에서 일하던 조선인 광부 중 일부는 여름이면 4주 정도 휴가를 내 네브라스카주에 있는 박용만선생의 농장에 찾아와 군사훈련을 받고 갔다. 그런 다음 일하던 탄광으로 돌아가 동료 한인광부들을 설득해 자신이 배워온 군사훈련을 같이 몸에 익혔다. 10시간 동안의 고된 노동을 끝내고 파김치가 된 상태에서 씻지도, 먹지도 않은 채 춥고 뜨거운 벌판에서 나뭇가지를 손에 쥐고 싸우는 연습을 했다. 이유는 한 가지. 일본군을 이기기 위해서였다.

조선인 노동자들은 언제가 조국이 부르면 조선으로 돌아가 일본군과 싸워야 하는데 어떻게 싸울지를 모르면 이길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목숨보다 중한 돈을 아낌없이 조국에 보냈다. 드러누워 자고 싶은 시간에도 이를 악물면서 군사훈련을 했다. 누가 강요한 일이 아니었다. 조국을 사랑하는 마음이 그렇게 하도록 했다. 망해버린 조선을 다시 일으켜 세우기 위해 그들은 자신을 희생했고, 얼마 되지 않은 돈을 아낌없이 조국에 보냈다.

대한민국은 그런 선인들의 희생과 헌신을 바탕으로 세워졌다. 록키산맥 곳곳에 남겨져 있는 선인들의 나라사랑 정신을 대하면서 기자는 한없이 부끄러웠다. 그래서 다르게 살아보자고 다짐했다. 부끄러움을 뒤늦게라도 깨달은 것이 다행이었다. 그런데 요즘 대한민국의 지도자라는 사람들에게서는 록키산맥 일대 조선인 노동자들이 보였던 희생과 헌신을 찾아보기 힘들다. 위장전입으로 부동산투기를 하고, 편법을 동원해 호의호식한다. 봉사와 기부는 외면 한다.

혼자 잘 먹고 잘살기 위해 온갖 편법을 동원해 재산을 모으고, 청문회에서는 ‘씨 나락 까먹는 소리’로 변명이나 해대는 인물들이 장관이 되는 이 나라가, 과연 제대로 된 나라인지 의구심이 크다. 법질서와 원칙을 외쳐대면서도 비리백화점이거나 사람이 덜된 이들을 장관으로 앉히는 이 권력이 과연 정상적인 권력인지도 묻고 싶다. 자기희생 없이, 편법으로 누리기만 하는 사람들이 청와대에서 임명장을 받아들고 의기양양하게 걸어가는 모습에 절로 고개가 저어진다.

1910년대 록키산맥 일대에 흩어져 살던 1천500여명의 조선인 노동자들은 먹고 살기 힘들었어도,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조국을 사랑’했다. 그러나 과거 장관자리에 올랐거나 지금 장관자리를 꿰차고 있는 상당수는 ‘모든 것을 바쳐 돈을 사랑’했다는 인상이 짙다. 그들이 부끄러움을 아는 사람들이라면 시비를 불러온 땅이나 아파트, 혹은 특혜성 대가들을 현금으로 환산해 사회에 기부하는 것이 옳다. 그것이 국민들에게 최소한의 염치를 지키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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