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조선 관군과 일본군의 동학농민군 진압

일본, 동학군 진압 위해 특수부대 창설하고 잔인한 토벌 시작

전투경험 많은 병사들로 후비보병 제19대대 만들어 조선으로 급파
강원~충청~전북, 경기~남원, 부산~광양~장흥 등 세 방향으로 진격
산악전 뛰어난 1중대 강원 토벌 후 능주에 진치고 장흥일대 초토화
 

제물포에 상륙한 일본군
1894년 6월 13일, 인천 제물포에 도착한 와카노우라 마루(和歌浦丸)와 일본 혼성여단의 선발 대대. 청군이 동학란 진압을 구실삼아 조선에 들어오자 일본은 그 다음날 제1군 사령부 및 제3사단 주력과 후속 부대를 조선에 상륙시켰다. 일본군은 청군을 물리친 뒤 동학군 소탕에 나섰다.
일본군 제물포 상륙을 묘사한 판화
일본군은 청일전쟁이 발발했던 1894년부터 1895년까지의 일본군 전투모습이나 위용을 새긴 전쟁판화를 제작해 남겼다. 전쟁판화 상당수는 小林淸親(고바야시 기요치카)가 제작한 日淸戰爭錦繪(일청전쟁니시키에)이다. 일본군이 인천에 상륙한 장면을 묘사한 것이다.
청일전쟁 개선을 기념한 판화
일본군이 청국과의 성화전투에서 승리하고 개선하는 장면을 묘사한 판화. 한양에 입성한 일본군들이 조선관리들로부터 환영을 받고 있는 것처럼 묘사돼 있다.
일본군이 동학농민군 토벌에 사용한 조선전도

■일본군 진압부대 편성

일본은 1894년 음력 8월 17일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후 여세를 몰아 압록강을 건너 9월 26일에 중국의 구룡성과 단동(丹東)을 점령했다. 일본은 본격적인 대륙침략을 위해 3만의 병력을 출동시켰다. 이에 따라 대동강 이남 지역의 수송로 확보를 위해 본토에서 특수부대인 후비보병(後備步兵)을 창설했다.

후비병은 현역 3년, 예비역 4년을 마치고 다시 5년간의 후비병역에 근무하는 병사들로 평균 30세에 이른 노련한 병사들이다. 1984년 음력 9월 20일 일본 육군대신은 특수부대인 독립 후비보병 제18대대를 서울수비대로 조선에 파견할 것을 승인했다.

갑오년 10월 6일 외무대신 김윤식은 충청도 홍주, 태안, 서산, 청주 지역에 동비(東匪;동학군)의 세력이 치열해서 평정하기 어렵다는 충청감사 박제순의 급보를 받고 일본군의 지원을 요청했다. 10월 9일에는 청오직 동학당 토벌을 목적으로 남소사랑(南小四郞)이 지휘하는 독립 후비보병 제19대대가 인천에 도착한다.

후비보병 19대대가 도착하기 전에는 일본군의 동학당 토벌은 인천의 병참사령관의 지휘를 받아 청일전쟁 과정에서 주로 병참기지 역할을 위해 설립된 용산·송파진·고양·평양·문경·낙동·가흥·충주·이천·태봉(台封)·부산·황주·대구병참대와 삼량진수비대, 안보수비대 등이 병참기지 인근의 토벌을 맡았다.

그러나 독립 후비보병 제19대 병력이 속속 도착하자 제18대대를 용산병참사령부에 배속시켜 일명 경성수비대라 칭하며 강원도 동학당 토벌에 참여시켰다. 또 6연대 산하를 황해도에 투입했다. 경상남도 지역은 별도로 인천사령부에서 부산수비대에 토벌을 맡겼다.

특히 부산수비대 4중대인 스키즈부대(鈴木安民)는 낙동강을 건너 마산포와 경상남도 진주, 곤양, 하동, 남해 등 남해안 토벌을 끝낸 다음 섬진강을 건너 광양, 여수, 순천, 낙안, 흥양, 보성을 거처 장흥까지 진격한다. 스즈키부대는 이두황의 우선봉진이 장흥을 떠난 1895년 1월 8일 이후 9일부터 5일간 장흥에 더 머무르며 동학농민군을 토벌한 뒤 1월 13일 부산으로 돌아간다.

갑오년 10월 15일(양력 11월 12일) 용산을 출발한 후비보병 19대대는 10월 17일부터 삼로(三路)로 나누어 서로분진대(2중대) 진위(振威)현, 중로분진대(대대본부 및 3중대) 용인(龍仁)현, 동로분진대(1중대) 이천(利川) 등으로 진군, 동학농민군을 토벌하기 시작한다.

10월 17일 진위(振威)현을 출발한 후비보병 19대대 서로분진대(2중대)는 10월 24일 공주에 입성하여 11월 14일까지 20일 동안 계속 공주와 공주인근에서 왕사(王師)인 경군과 합동으로 동학당을 토벌한다. 이후 11월 15일과 16일에는 논산과 용수막으로 진격하다 다시 11월 17일 논산으로 입성해 진압을 완료하고 잔당소탕을 위해 경리청의 성하영 부대를 공주에 남겨놓는다.

10월 17일 용인을 출발한 중로분진대(대대본부 및 3중대)는 공주전투가 시작될 무렵 청주에 입성해 11월 4일까지 문의(文義)와 증약 등지에 주둔하여 동학당을 토벌한다. 11월 5~9일까지는 주로 옥천에서 토벌하다가 이후 금산, 진산, 연산, 노성을 거쳐 11월 16일~19일까지는 은진에 주둔한다.

10월 17일 이천을 출발한 동로분진대(1중대)는 10월 21~24일까지 충주에 주둔하다가 공주전투가 치열하게 시작되는 10월 25일에는 인천병참사령부의 명령에 따라 11월 17일까지 후비보병 18대대(경성수비대)의 1개 중대와 함께 강원도 동학당 토벌을 수행한다. 11월 18일 문경에서 다시 전라도 동학당 토벌을 명령받고 남소사랑(南小四郞)의 휘하로 복귀한다.

남소사랑은 11월 20일부터 은진에서 후비보병 19대대본부와 서로분진대 2중대 및 중로분진대 3중대를 통합해 23일까지 운영한다. 11월 24일 전주에서부터는 후비보병 대대본부와 2중대 3중대, 경군(京軍)이 통합돼 조일(朝日)연합 지대로 편성된다. 이 부대는 11월 30일까지 전주를 중심으로 인근 금구, 태인, 장수, 장계, 천원, 고부 등지에서 전투를 벌인다.

이때 다시 전라도 동학당 토벌을 명령받은 동로분진대 1중대는 11월 19일 태봉을 거쳐 20일(상주), 21일(공성), 22일(개녕), 23일(김천), 24일(지례), 25일(신창), 26일(거창), 27일(안의), 28일(함양), 29일(운봉)을 걸쳐 30일 남원에 입성하여 12월 3일까지 체류하면서 동학당을 토벌한다.

송목정보(松木正保)가 지휘하는 후비보병 19대대 1중대는 12월 12일부터 교도중대의 1개 소대를 지원받아 능주(綾州)에다 중대본부의 진을 친다. 그리고 이곳에서 장평·유치를 넘나들며 12월 13일 남외리 전투와 부산면의 유앵동(有鶯洞: 현 유량리) 전투를 필두로 14~15일의 장흥 석대들 전투 등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운다.

일본군은 동학농민군 토벌이 끝난 다음 논공행상을 시행할 때 이 부대 83명에게 포상을 내린다. 남소사랑(南小四郞) 대대장은 나주에서 장흥토벌을 위해 1중대를 출진시킨다. 1중대는 조선에서의 산악전투 경험이 많이 쌓여 제19대대에서 전력이 가장 우수한 중대였다.

11월 24일 후비보병 대대본부와 2중대 3중대, 경군(京軍)으로 통합된 조일(朝日)연합군은 12월 1일 임실, 장성, 흥덕을 거쳐 2일에는 오수역, 대흥, 쌍암리, 고창을 토벌하고, 일본군 1진이 남원에 입성한다. 12월 2일에는 남소사랑(南小四郞)의 대대본부가 남원에 입성하여 일본군 1중대를 본대에 편입시킨다. 이때 일본군 2중대는 장성에서, 조일(朝日)연합군은 순창과 무장 등지에서 동학농민군을 토벌한다.

정리/최혁 기자 kjchoi@namdonews.com
/위의환 저 <장흥동학농민혁명사료총서>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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