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순동학군 최경선 휘하에서 나주성 공격 등 맹활약

(77) 화순의 동학농민군
화순동학군 최경선 휘하에서 나주성 공격 등 맹활약
농민군 1894년 6월 능주에 집강소 설치 후 폐정개혁
최경선 지휘부대 수차례 나주성 공격실패로 세력 약화
벽송마을로 피했던 농민군, 관군습격으로 157명 사망
 

능주목고지도
1872년 제작된 <지방지도>의 능주목. 능주(綾州)는 전남 화순 지역의 옛 지명이다. 삼한시대 마한에 속한 능주는 죽수부리(竹樹夫里)였다. 죽수(대나무) 부리(넓은)라 불리게 된 것은 대나무 밭들이 많아서였다. 죽수는 능주의 오래전 이름이다. 백제 때는 이릉부리(爾陵夫里)였으며 신라 때(757년)는 능성군(能城郡)으로 불렸다. 1632년(인조10) 인헌왕후(仁獻王后) 구씨(具氏)의 고향이라 하여 능주목으로 했다. 1895년 23부제실시 때 나주부의 능주군이 되고 다음해 전라남도에 속하였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화순군에 합쳐 능주면이 됐다.
능주관아 전경. 현재 능주면사무소가 있는 곳 일대가 옛 능주 관아 건물이 있던 자리다.

전남 화순지역 동학농민군에 대한 자료는 그리 많지 않다. 몇 가지 문헌을 참고해볼 때 능주를 포함한 화순지역 농민군들은 최경선 대접주의 지휘를 받아 나주성 공격과 장흥전투에 참여한 것으로 보인다. 동학농민군은 전주화약이후 1894년 음력 6월부터 각 고을에 집강소를 설치했는데 화순지역은 전봉준(全琫準) 장군이 총괄하는 호남우도 대도소 관할이었다.

동학지도부는 전주에 동학 대도소를 설치하고 우도와 좌도에 지역별 대도소를 설치했다. 원평(金溝 院坪)에는 전봉준 장군이 총괄하는 호남우도 대도소가, 남원에는 김개남(金開南, 箕範) 대접주가 총괄하는 호남좌도 대도소가 설치됐다. 보수 세력의 저항이 크고 지역이 넓은 순천과 광양, 낙안, 금산, 용담, 무주, 진산 지역은 별도로 동학군이 담당토록 했다.

좌도 대도소의 영역은 담양(譚陽), 곡성(谷城), 구례(求禮), 창평(昌平), 옥과(玉果), 순천(順天), 광양(光陽), 낙안(樂安), 보성(寶城), 흥양(興陽, 高興)과 지금의 전북지역인 금산(錦山), 진산(珍山), 용담(龍潭), 진안(鎭安), 무주(茂朱)를 포함하여 태인(泰仁), 장수(長水), 임실(任實), 순창(淳昌) 등 19개 지역이었다. 따라서 화순은 전봉준 장군 참모들의 통솔아래 있었다.
 

능주동헌지
능주목 동헌이 있었던 자리임을 나타내는 기념비석

능주 지역 동학농민군의 활동상은 집강소 시기부터 자료에서 확인된다

화순지역 농민군은 1894년 음력 7월 능주 관아를 점령하고 집강소를 설치했다. 당시 능주를 방문했던 일본인 우미우라(海浦篤彌)는 동학농민군의 집강소에 대해 <동학당시찰기>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대도소는 능주 관청을 본영으로 삼았으며 사람과 말이 많았고 흰색 목면 천으로 깃발을 만들어 문밖에 둘렀다. 영기(令旗)를 마당 가운데 세워 위엄을 높였다.”

능주 관아를 점령하고 집강소를 설치한 농민군이 능주 일대의 농민군인지, 아니면 장흥 일대의 농민군인지는 분명치 않다. 그렇지만 장흥 농민군이 능주 지역을 수차례 넘어와 소와 말, 재물들을 빼앗아갔다는 기록을 참조해보면 능주가 장흥 유치와 부산 일대 농민군의 영향력 아래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장흥 농민군이 능주 관아를 접수해 집강소를 설치했다는 것은 다소 무리다. 능주 일대의 농민군이 집강소를 설치해 운영했다는 것이 올바른 추정일 것이다. 그렇게보면 능주 일대의 동학농민군의 규모는 상당했던 것으로 보인다. 화순과 능주, 동복 일대의 동학세력은 타 지역에 못지않게 컸던 것으로 전해진다.

관군 측이 처형한 것으로 기록돼 있는 화순지역 동학농민군은 화순동학의 지도자였던 왕일신과 김용보, 조번개, 김자근, 최성칠, 최범구 등이다. 능주에서는 조종순과 권익득, 손영기, 오병채, 이중채 등이다. 이외에도 성명을 알 수 없는 13명의 농민군이 능주출신인 것으로 관군기록에 나타나 있다. 동복에서는 이형백, 장운학, 박건양, 김중현, 김병혁, 최자중, 노익호, 전경선 등이 관군에게 잡혀 처형당했다.
 

죽수절제아문(竹樹節制衙門)
화순군 능주면 석고리에 있는 조선 시대 관아 정문. 죽수절제아문은 능주현의 동헌(東軒)인 녹의당(綠倚堂)의 정문이다. 능주는 시대에 따라 현, 군, 목 등의 행정 구역 중심지였다. 따라서 관아가 있었고 동헌과 객사(客舍) 등 많은 건물이 있었다.

다음 회에 자세히 기록하겠지만 화순 남면 벽송리(碧松里) 벽송마을에서는 동학농민군 220여명이 민보군과 싸우다 157명이 죽고 63명은 포로가 됐다. 1894년 음력 12월 1일 광주에서 퇴각한 최경선은 동복으로 내려와 외남면의 벽송리와 사평리(沙坪里)에 머물며 전열을 가다듬고 있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나주 초토영의 포순 300명과 화순 민보군이 12월 4일 벽송마을을 급습해 농민군과 치열한 전투를 치렀다. 나주성을 공격하면서 크고 작은 상처를 입었고 추위 가운데 먼 길을 걸어와 기력이 쇠해진 농민군들은 제대로 싸울 수가 없었다. 벽송마을 전투를 끝으로 사실상 화순지역의 동학농민혁명은 막을 내리게 된다.

/최혁 기자 kjchoi@namdonews.com

<박스>

새 세상을 열기위해 온몸을 바친 최경선

전봉준의 오른팔로 활약 화순 남면에서 생포돼 처형당해
 

최경선

최경선(崔景善)은 전봉준과 손화중·김개남 등과 함께 동학농민혁명의 최고 지도자였다. 족보명은 병석(炳碩), 자(字)는 낙필(洛弼) 또는 경선(景善)이다. 태인현 서촌면 월천동(지금의 전북 정읍군 북면)에서 1859년 11월에 출생해 태인 주산마을에서 성장했다. 최경선은 태인의 김덕명 포에 속해 있던 접주였다.

최경선은 동학농민혁명 전개과정에서 전봉준의 오른팔로서 혹은 책사(策士)로서 전봉준과 운명을 같이 했다. 그는 1893년 11월, 농민들이 탐관오리 축출을 맹세하면서 작성한 사발통문에 이름을 올린 20명 중의 한명이다. 최경선은 1894년 음력 3월 농민전쟁이 발발하자 영솔장 직책을 맡아 황토현과 황룡강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전봉준과 함께 농민군 운용에 대한 전략을 짜고 실행에 옮긴 핵심 참모이자 지도자이다. 7월 초에는 수천의 농민군을 이끌고 나주성을 공격하기도 했다. 9월에는 광주에서 삼례로 올라와 전봉준과 함께 농민군의 재기병 문제를 논의했다. 이후 한양으로 진격하는 전봉준의 주력부대를 후방에서 방어하는 임무를 맡아 나주와 장흥, 강진 일대의 관군을 견제했다.

농민군의 후환을 없애려 수차례나 나주 성을 공격했다. 그러나 수성군과의 전투에서 패해 최경선이 이끄는 농민군은 급격히 와해됐다. 12월 1일 손화중이 광주에서 농민군을 해산하자 최경선은 200여명의 농민군을 이끌고 동복으로 향했다. 최경선은 동복에서 농민군을 재규합, 관군과의 싸움에 대비했으나 12월 4일 민보군의 기습을 받아 체포됐다.

1895년 3월 29일 전봉준 등과 함께 교수형을 당했다. 최경선은 2차 농민전쟁이 막 타오르던 1894년 음력 9월에 아들을 보았으나 아들의 돌도 보지 못한 채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그 아들도 어린나이에 죽어 큰 집 조카가 아들로 입적돼 대를 이었다. 그는 전봉준, 손화중과 함께 동학농민혁명을 통해 새 세상을 열기위해 온 몸을 바쳤던 인물이다.
/최혁 기자 kjchoi@namdonews.com

 

능주향교(1974년)
능주공립보통학교와 능주 전경
죽수절제아문 과거(1938년)
봉서루(1938년)
"광주전남 지역민의 소중한 제보를 기다립니다"  기사제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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