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그리고 그리움에 관하여…

가을, 그리고 그리움에 관하여…

<박상신 칼럼니스트>
 

하늘이 열린다는 개천(開天)의 10월이 다가온다. 얼마 전 모교에서 동문회가 열린다는 소식을 접했다. 오랜 세월이나 난 모교에 간 적이 없다. 교정이 얼마나 변했는지, 어떤 느낌으로 다가올지, 선생님은 무탈하게 지내시는지, 잠시 눈을 감으니 80년대의 아련한 기억이 떠오른다.

며칠 전, 동창 밴드에 몇 장의 사진이 올라왔다. 한 친구가 소중하게 간직해 온 빛바랜 교련복과 각반, 그 외 당시의 비품 사진을 올렸다. 지란지교를 꿈꾸던 친구들, 얼마나 변해 있을지, 그들을 만날 생각에 나는 새장가를 가는 순박한 시골 촌놈처럼 마음속엔 그리움과 설렘이란 샘물이 용솟음쳤다. 그 시절, 친구들과 어울려 가을 소풍을 갔던 일, 짜장면을 누가 빨리 먹나, 내기 아닌 내기를 한 기억, 교복 바지를 쫄바지로 줄여 등굣길 선도부 형에게 잡혀 벌 받은 기억, 지금은 터미널이 들어선 광천동 허허벌판, 덩그렇게 놓인 롤러스케이트 장의 기억, 그 외에도 숱한 기억들이 이젠 내 앞에 그리움으로 다가왔다. 내가 다닌 교정에도 어김없이 가을볕이 내리쬐리라! 30여 년 전, 그날도 그리움의 가을 햇살은 교정 어귀를 비췄으리라! 회귀의 시간, 수십 년을 거슬러 기억의 터널을 지나서는 누구에게도 뺏길 수 없는 그리운 친구들, 지금은 초로(初老)의 모습이 돼 있을 선생님이 보이자, 어느 새 내 가슴엔 커다란 그리움 덩이와 벅찬 감동 하나가 자리하는 것만 같았다.

가을의 절정을 알리듯 태양이 작렬하던 여름도 어느 새 사라지고 그토록 바라던 가을이 성큼 다가왔다. 여느 여름보다 강렬했던 무더위도 그 무게 만큼이나 서민들의 마음에 생채기만 남겨놓은 채 아련한 기억의 역사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올해도 어김없이 찾아오는 가을, 하지만 이번 가을은 사람들에게 그 쓸쓸함이 더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연일 언론 지면엔 몹쓸 일들이 사람들에게 희망보단 절망으로 다가오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사람들은 10월의 파란 하늘을 더 기다리는지도 모른다.

얼마 전 추석 연휴 때였다. 난 요즘 기획하고 있는 소설 속 장소를 취재하러 부여에 간 적이 있었다. 가는 길마다 벼 이삭이 누렇게 물든 들녘과 청초하리만큼 파란 하늘이 내 여정의 동반자처럼 따라다녔다. 잠시 차창 밖으로 불어오는 가을바람의 시원함을 온몸으로 느껴 보았다. 그 바람은 어릴 적 무릎베개를 해주며 손부채로 시원함을 건네준 어머니의 품속처럼 다가왔다. 시간이 지나자, 내가 찾아간 동네가 한눈에 들어왔다. 돌담길 사이로 여기저기 빨간 홍시가 소담스레 매달리고 고향을 찾은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예나 지금이나 마을 속 풍경은 편안함이 묻어나 보였다. 홍시가 달린 감나무를 올려다보자, 나뭇잎 사이로 파란 가을이 보이고 가을 햇볕이 내 얼굴을 비쳤다. 문득 나도 모르게 어린 시절의 추억이 한눈에 들어왔다. 그래서인지 사람들은 늘 그리움을 먹고 산다. 어릴 적 뛰놀던 뒷동산 친구들과의 추억들, 소담스레 끓인 시래깃국을 아들 밥상에 올려주시던 어머니의 모습, 그리고 아스라이 피어오르던 첫사랑의 기억이, 애틋한 그리움 되어 가을 하늘에 울려 퍼진다.

디지털화된 세상, 너무나 빨리 변해버린 세상에 우리가 조금은 지쳐 있는 게 아닌지 반문해 본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만의 옛 추억을 떠올리며 위안을 얻고, 고민을 해결하려 한다. 아날로그적인 삶을 살아온 그들에게 그리움이란 묘약 같은 샘에서 끝없이 솟아나는 정신적 정화수처럼 오묘한 자연의 섭리가 있는 듯하다. 글로는 표현하기 어려운 그 무엇이…. 자연에도 사계(四季)가 존재하듯이 인생에도 희로애락(喜怒哀樂)이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이 가을날 사람들에게 잠시나마 휴대폰을 접어두길 권하고 싶다. “가을 하늘을 바라보자. 그 하늘에 그리운 사람들, 그리운 추억들을 그려보자”고 제안하고 싶다. 그리곤 각박한 현실에서 그리운 곳, 그리운 사람을 그려본다면 삶의 큰 위안이 되리라 믿는다.

그리움을 아는 사람이라면 지금의 현실에 맞서 헤쳐갈 용기가 있는 사람이다. 왜냐고 묻는다면 그들은 사람 냄새가 나는 세상을 아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10월의 하늘엔 고향이 있고, 친구가 있고, 그리움 덩이가 뭉게구름처럼 떠다닌다. 10월이 되면 난 유난히도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 은사인 곽재구 시인과 ‘사평역에서’란 시(詩)다. 그 시(詩)엔 그리움이라는 정화의 요정이 살아 숨 쉬고 있기 때문이다.
 

"광주전남 지역민의 소중한 제보를 기다립니다"  기사제보
저작권자 © 남도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