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복 벽송마을로 피한 농민군 관군공격에 떼죽음

<79회 동복의 동학농민혁명 유적지>

동복 벽송마을로 피한 농민군 관군공격에 떼죽음

최경선 농민군 220명 수성군 기습받아 157명 현장에서 사살당해

포로로 잡힌 63명은 나주 감영 끌려가 대부분 형장이슬로 사라져

벽송 마을에 동학농민군의 희생과 의로움 알리는 기념비 세워져야
 

화순군 남면의 벽송마을. 광주에서 물러나 동복으로 피신했던 최경선 휘하의 농민군 220명이 관군의 습격을 받아 큰 피해를 입었던 곳이다. 벽송마을 어르신들은 마을에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라며 당시 관군들이 사평쪽에서 접근해와 농민군들을 진압했다고 말했다.

■동복 동학도의 피해규모

동학농민혁명이 진행되던 1894년, 지금의 화순지역에는 능주, 화순, 동복 3개 군이 있었다. 능주와 화순, 동복 3개 군에는 동학접주가 있었으며 동학세도 매우 컸다. 농민군을 진압했던 좌선봉진 대장 이규태는 <순무선봉진등록>(巡撫先鋒陣謄錄)에서 동복을 무장·광주·담양·장흥·무안·함평·흥양(고흥)·부안·장성·고부 등과 함께 ‘동학의 대 소굴’이라고 지칭했다.

갑오년(1894년) 12월에 호남초토사 민종렬이 조정에 보고한 <전라도소촉소획동도성책>(全羅道所促所獲東徒成冊)과 1895년 1월에 관군이 전라도 각읍에서 노획한 동도(동학농민군을 일컬음)의 수효와 장령의 성명을 적은 성책 <전라도각읍소획동도수효급장령성명병록성책>(開國五百四年 正月 日 全羅道各邑所獲東徒 數爻及將領姓名병錄成冊)에는 능주·화순지역에서 처형하거나 체포한 농민군 기록이 있는데 여기에 동복 일대 농민군의 규모를 짐작해볼 수 내용이 있다.

<전라도소촉소획동도성책>과 <전라도각읍소획동도수효급장령성명병록성책>에는 동복출신 동학도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돼 있다.

“甲子年 12월 초 3일에 잡힌 동복출신 동학도가 220명이었고 그 가운데에서 157명은 전투중 포살(砲殺:싸움터에서 총을 맞아 그 자리에서 죽음)되고 63명은 포로로 잡혔다. 최경선은 그날 잡혀 일본군에 압송당하고 이형백(李亨伯)은 바로 죽고, 장운학(張雲鶴)·박건양(朴建洋)·김중현(金仲鉉)·김병혁(金炳赫)은 심문 후 죽었다. 그리고 동당(同黨) 59명은 감옥에 수감하여 그 죄의 경중에 따라 처리했다. 그리고 동학의 우두머리 최자중(崔子仲)·노익호(盧益浩)·전경선(全敬先)은 8일에 체포되어 상부에 압송하는 도중에 모두 죽었다”

“동복의 동학 우두머리 박문주(朴文周)·엄내영(嚴乃英)을 1895년 1월 20일에 잡아 압송해서 진영에 넘기고 엄중히 조사하여 실상을 파악하도록 했다”
 

화순 벽송마을

■벽송마을 전투와 농민군 피해

화순지역 농민군은 나주성과 장흥지역 전투에 가담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벌였다 동학지도부 손화중과 최경선은 농민군을 이끌고 1894년 음력 10월과 11월에 수 차례나 나주성을 공격했다. 그러나 나주 성을 지키고 있었던 초토사 민종렬의 전술과 관군의 우월한 전투력을 극복하지 못하고 결국 광주에서 밀려나왔다.

동학군이 급속도로 와해되기 시작한 것은 동학지도부가 대거 체포되기 시작한 1894년 음력 12월이었다. 광주에서는 12월 1일 손화중이 무리를 해산하고 떠났다. 최경선은 220명의 동학군을 이끌고 동복으로 향했다. 비교적 산세가 험한 동복 일대에서 자리를 잡아 전열을 가다듬기 위해서였던 것으로 이해된다.

최경선은 12월 3일 나주 인근의 남평 현 관아를 점령했다. 동학군은 남평수령의 인부(印府) 를 빼앗았다. 현감 이희화는 탄환을 맞고 중상을 입었다. 남평현이 동학군의 수중에 들어갔다는 보고를 받은 초토사 민종렬은 나주의 관군과 수성군을 보내 화순, 능주, 동복 일대의 수성군과 함께 농민군을 토벌토록 했다.

최경선을 비롯한 농민군들은 사평을 거쳐 벽송마을로 들어와 관군과의 다음 전투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러나 모든 상황이 농민군에 불리했다. 무엇보다 농민군들의 사기가 떨어져 있었다. 날씨도 매우 추웠다. 농민군은 벽송마을 곳곳의 민가에 들어가 잠을 청하거나 쉬면서 고단한 몸을 누이고 있었다.

3일 밤 벽송마을로 관군들이 밀고 들어왔다. 기습을 당한 농민군은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숫적으로도 열세였고, 무기로도 당해낼 수가 없었다. 벽송마을에 머물던 농민군 157명이 그날 목숨을 잃었다. 63명은 포로로 잡혔다. 최경선은 그날 잡혀 일본군에 압송당해 뒤에 처형당했다. 사로잡힌 농민군 상당수는 뒤에 사형을 당했고 극히 일부는 수감됐다가 풀려났다.
/최혁 기자 kjchoi@namdonews.com
 

벽송마을 최종수씨. 최씨는 벽송마을은 동학 때나 6·25 전쟁 때 많은 인명피해가 난 마을이라고 말했다. 최씨가 마을이 입은 피해내력에 대해 말하고 있다.

<박스>

벽송마을 전투의 의미

벽송마을 전투는 동학군과 수성군 사이의 전투내용이 관군의 기록에 의해 상세하게 남겨진 전투다. 전남지역의 수많은 동학농민군전투(남도전투:위의환 선생 命名)중에 전투경과와 농민군 사망자 수, 체포된 농민군의 이름과 처벌내용, 그리고 농민군을 토벌하는데 공을 세운 수성군 명단이 기록된 것은 매우 드문 경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역민들 가운데 벽송마을 전투를 아는 이가 거의 없다. 후손들이 이를 자세히 밝히지 않았고, 알리지도 않았고, 기억하지도 않았으며, 그리고 기념하지도 않아서이다. 마을 입구에는 이곳이 벽송마을이라는 것을 알리는 표지석만 있을 뿐 벽송마을 전투를 기리는 어떤 안내문이나 위령비도 없다. 마을 주민들도 고령층만 이같은 사실을 알고 있을 뿐, 나이가 젊은 층은 알지 못하고 있다.

이래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다. 새로운 세상을 위해 의롭게 싸우다 목숨을 잃은 동학농민군들의 희생을 이렇게 망각하고, 가볍게 여기는 것은 애국선열들에 대한 모욕이자 정체성 포기이다. 외세에 능욕당하고, 부패관리에 수탈당했던 역사를 망각해서는 안 된다. 동학농민혁명에 대한 재평가와 국민들의 관심이 절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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