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순농민군 다수 이십곡리에서 사살·체포 당해

남도동학유적지-<80회 화순의 동학농민혁명 유적지>

화순농민군 다수 이십곡리에서 사살·체포 당해

장흥 석대들 전투 패배 후 무등산 쪽으로 도주하던 농민군 희생 당해

수무실 마을 입구에서 다수 목숨 잃어…이후로 ‘원(怨) 모퉁이’로 불려

어머니에게 구명(求命) 호소한 한달문 옥중서신은 농민군 측 주요자료
 

화순고지도. 1872년 제작된 <지방지도>의 화순군

■ ‘이십곡리’(二十谷里)농민군 처형지

최경선 대접주의 지휘아래 있던 화순지역 농민군들은 1894년 나주성과 장녕성(장흥성), 병영성 공격 등 남도전투에 대거 참여한 것으로 보인다. 화순군 농민군들은 나주성 공격이 실패하고 오히려 관군들의 추격을 받자 최경선과 함께 동복으로 피신했으나 관군의 기습을 받아 큰 피해를 입었다. 농민군 153명이 죽고 63명이 체포돼 죽거나 모진 고문을 당했다.

지난 회에 기술한 벽송마을 참극이다. 최경선의 주력부대가 벽송마을에서 와해되자 화순농민군들은 장흥으로 몰려갔다. 장흥 사창에서 집결한 농민군들은 1894년 음력 12월 16일 석대들에서 조선관군과 일본군을 상대로 최후의 일전을 벌인다. 3일 간에 걸친 석대들 전투가 결국 농민군의 패배로 끝나자 화순농민군을 비롯한 농민군들은 살길을 찾아 섬으로 혹은 깊은 산을 찾아 무등산이나 지리산 쪽으로 향했다.

장흥에서 능주~화순을 거쳐 무등산 방향으로 도주하던 농민군들이 관군의 공격을 받아 처참하게 목숨을 잃은 곳이 ‘수무실마을’이라 불리는 ‘이십곡리’(二十谷里)이다. 얼마나 많은 농민군이 희생됐는지는 정확하게 알려져 있지 않다. 마을에 전해오는 이야기로는 상당히 많은 농민군들이 관군의 공격을 받아 마을입구와 마을 뒷산에서 숨지거나 체포됐다. 이 때문에 수무실마을 입구는 ‘원통하게 돌아가는 산모퉁’라 하여 ‘원 모퉁이’라고도 불리운다.
 

이십곡리 마을 입구 모습. 화순에서 광주방향의 구 너릿재 길이 시작되는 지점에 마을입구가 있다.

 

 

화순 이십곡리 마을 전경

■한달문(韓達文) 묘와 옥중서한( 獄中書翰)

한달문은 화순과 나주지역에서 동학농민군 지도자로 활동했던 인물이다. 기록에 따르면 한달문은 1894년 음력 12월 나주 동의(東義)면에서 민포군에게 붙잡혔다. 민포군은 동학농민군에 맞서 싸우던 민간인 대항군이다. 유생과 관군을 중심으로 부보상이나 관에 속해있던 노비, 혹은 포수들로 구성됐던 민병(民兵)이었다.

한달문은 나주의 초토영으로 압송됐다. 나주에는 이두황이 지휘하던 우선봉 군사들이 초토영에 머물고 있었다. 호남초토사(湖南招討使)였던 민종렬나주목사의 군사도 나주감영에 상당수 있었다. 한달문은 농민군 27명과 함께 우선봉진으로 끌려가 고문을 받았다. 이중 강도수(姜道守),정사심(鄭士心),이화삼(李化三 )등 13명은 총살됐다.

한달문과 주심언(朱心彦) 등 14명은 나주감영에서 무지막지한 심문을 받았다. 나주감영에 끌려간 농민군들은 뼈가 으스러지도록 맞았다. 일본군 기록에 보면 관군과 일본군은 붙잡은 농민군을 무차별 때린 후 불에 태워 죽였다. 나주 옥에 갇혀있던 한달문은 돈을 쓰면 목숨을 부지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 어머니에게 돈을 마련해줄 것을 요청하는 편지를 썼다. 이 편지가 바로 <한달문 옥중서한>이다.

한달문 옥중서한은 그의 종제(從弟)였던 한일수의 손자 한병만(韓秉萬)씨가 족보 속에서 발견해 공개한 것이다. 편지의 내용이나 이후 정황을 헤아려 보면 한달문은 돈을 써서 감옥에서 풀려나오는데 성공했다. 한일수는 한달문을 나주감옥에서 업고 자신의 집에서 그를 치료했다. 그러나 한달문은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 당한 모진 매질의 후유증을 이기지 못해 감옥에서 풀려난 지 이틀 만인 1895년 음력 4월 1일에 숨을 거두고 만다.

한달문이 붙잡힌 때는 1895년 음력 12월 초였으니 4개월 동안 매질과 고문에 시달린 셈이다. 그러니 그만큼 장독(杖毒)이 깊었을 것이다. 한달문의 옥중서한은 매우 귀중한 자료다. 감옥에서 풀려난 한달문이 이틀만에 사망한 것은 동학농민군들이 감옥에서 어떤 대우를 받았는지를 짐작케 한다. 또 역적이라 여겨졌던 동학농민군의 지도자가 돈을 써서 풀려날 수 있었다는 것은, 그만큼 관리들의 부정부패가 심했다는 것을 헤아릴 수 있는 대목이다.

한달문은 ‘도장면 동두산’(道莊面東斗山:현 도암면 원천리 동산)에 살고 있는 어머니 쌍동댁(雙同宅)에게 보낸 이 편지에서 “300냥을 보내주면 목숨을 건질 수 있을 것 같다”고 애절하게 말하고 있다. 동학농민혁명과 관련된 자료 대부분은 관군이나 일본군이 작성한 것이다. 그런데 감옥에 갇혀있던 농민군이 구명(救命)을 위해 가족에게 보낸 편지는 한달문의 옥중서한이 유일하다.

한달문 편지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현대문으로 고쳐진 것임)

(앞면 내용)

어머님께 올리나이다. 제번하고 모자 이별 후로 소식이 서로 막혀 막막하였습니다. 남북으로 가셨으니 죽은 줄만 알고 소식이 없어 답답하였습니다. 처음에 나주 동창 유기모 시굴점 등에서 죽을 고생하다가 한 사람을 만나서 소자의 토시로 신표하여 보내어 어머님 함께 오시길 기다렸더니 12월 20일 소식도 모르고 이날 나주 옥으로 오니 소식이 끊어지고 노자 한 푼 없으니 우선 굶어 죽게 되니 어찌 원통치 아니하리오.

돈 300여 냥이 오면 어진 사람 만나 살아날 묘책이 있어 급히 사람을 보내니, 어머님 불효한 자식을 급히 살려주시오. 그간 집안 유고를 몰라 기록하니 어머님 몸에 혹 유고 계시거든 곁 사람이라도 와야 하겠습니다. 부디 부디 명심불망하옵고 즉시 오시기를 차망복망하옵니다. 남은 말씀 무수하나 서로 만나 말하옵기로 그만 그치나이다.

갑오년 섣달 28일 達文 上書

의복 상하 벌, 보신 한 벌, 토시 한 벌, 주의 한 벌, 망건, 노자 2량.

온 사람과 함께 가 과세를 편히 할 터이니 혹 家故가 있어 못 오면 玉洞 가고골 한기주에게 의복지어 보내소서.

(뒷면) 道莊面 東斗山 雙同宅

 

 

 

 

한달문 옥중편지 전면. 동학농민혁명 당시 체포된 농민군에 대한 관군의 고문이 어떠했는지, 그리고 돈을 쓰면 구명운동이 가능했다는 사실을 헤아려 볼 수 있는 자료다. 동학농민군의 입장에서 기록된 중요한 편지다. 화순군향토문화유산 제31호로 지정됐다.

 

 

한달문 옥중편지 후면.

한달문은 한치화(족보상으로는 한영우)와 동일 인물로 전해지고 있다. 한치화는 1887년 절충장군용양위부호군의 직첩을 받은 인물이다. 한달문은 화순농민군을 이끌고 나주 쪽의 전투에 참가한 것으로 추정된다. 농민군은 나주성을 함락시키기 위해 1894년 음력 7월과 11월, 수차례에 걸쳐 공격을 감행했다. 11월에만 세 차례나 공격했으나 결국 실패하고 쫓기는 신세가 됐다. 관군기록 <全羅道所捉·所獲東徒成冊 나주조>을 참조해보면 한달문은 이때 동창 쪽으로 퇴각하다가 민보군과 싸우다 체포된 것으로 보인다.

 

화순 동학접주 한달문의 묘. 화순군 도암면 원천리 옥동마을 입구에 있다

/최혁 기자 kjhyuckchoi@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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