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개남 뜻따라 고흥에 조련장 설치하고 군사훈련

<84. 고흥의 동학농민혁명>
김개남 뜻따라 고흥에 조련장 설치하고 군사훈련
‘관민상화(官民相和)’정책으로 전주화약 체결 이후 농민군 철수
집강소 운영· 군사 조련장 설치해 2차 농민전쟁 준비
김개남 “군사 역량 보전하고 활발한 군사적 활동 전개”
 

1948년 고흥군청 전경
동학농민혁명 당시 집강소는 대부분 관아에 설치됐다. 옛 관아터에는 대부분 행정기관들이 들어서 있다. 고흥 역시 옛 관아터인 군청자리에 집강소가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 고흥군 제공
구 고흥군청사
현재 고흥군청사

■ 고흥의 집강소
동학농민군이 전라도 일대를 휩쓸고 있을 무렵 각 지역의 치안 질서와 지방 행정은 거의 마비 상태에 놓여 이를 회복하기가 매우 어려웠다. 동학농민군은 전주성을 점령했으나 청·일군의 조선 출병이라는 예기치 못한 상황이 벌어지자 ‘관민상화(官民相和)’라는 원칙하에 5월 7일부터 전주에서 철수하기 시작했다. 고흥동학농민군 또한 전주성에서 빠져나와 구례를 지나 고흥으로 돌아갔다.

전주화약이 체결돼 고흥으로 돌아온 이후 고흥동학농민군도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치안 질서를 바로잡기 위해 접소나 도소(집강소)를 설치했다. 부패 관리들을 쫓아내고 지역사회에서 존경받는 동학교도를 선정해 치안과 행정을 담당하게 했다. 집강소를 통해 폐정개혁을 추진하였다. 조선 역사상 처음으로 농민이 권력을 장악하고 농민의 정치를 실현했다는 면에서 집강소 설치는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고흥에 집강소가 설치돼 운영된 것만은 확실하다. 오지영은 <동학사>에서 “집강소는 전라도 53개 고을에 모두 설치됐다”고 기록하고 있다. <강재일사>에도 나주를 제외하고 모든 고을이 도집을 설치했다고 기록돼 있다. 고흥 인근 지역인 장흥과 강진에도 접소가 설치돼 각종 폐정개혁안 등을 행사하고 있었다. 하지만 열두 가지 폐정개혁안을 모두 실행하는 데는 어려움이 많았다.

고흥에서 집강소가 운영된 것은 1894년 음력 8월까지였다. 고흥지역 수성군이 8월에 결성돼 활동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후로도 간헐적으로 농민군이 고흥을 행정을 좌우한 것으로 보인다. 고흥(흥양현)이 조정에 보낸 보고서에 따르면 ‘동학난’동안 10여 차례나 고흥읍이 점령당했다고 적혀있다. 해산하지 않은 농민군들이 집강소를 운영하면서 수성군과 상당한 마찰을 겪은 것으로 보인다.

■ 집강소시기 고흥농민군의 군사 조련장

고흥으로 돌아온 고흥 농민군은 곧바로 전주화약에 의거하여 집강소를 설치했다. 이후 농민군은 포두면(浦頭面) 봉림(鳳林)과 도양읍(道陽邑) 관리(官里) 산중에 군사 조련장을 설치해 운영했다. 군사 조련장은 봉림 조련장과 도양 조련장이었다.

● 봉림 조련장

 

 

동학농민군 봉림 훈련소내 훈련장 (포두면 봉림) /고흥문화원 제공

위치: 고흥군 포두면 봉림리 봉림마을 (봉림 방앗간 지휘소)
조직: 훈련대장 오윤영, 도집 신학구, 조련장 신춘구
지형: 천등산의 내 첩첩산중, 도화면과 풍양면으로 가는 교통요충지(민치가 있음)

● 도양 조련장

 

 

 

 

좌측 흰색 건물 위쪽이 도양훈련소가 들어섰던 곳이다 (도양읍 원동)

 

 

 

도양 농민훈련장 인근에 자리 잡은 도양 감목관터 (도양읍 관리)
흥동학농민군의 도양훈련소 훈련대장이었던 정창도의 기념비 (도양 원동)

위치: 고흥군 도양면 관리(도양중학교 옆 박씨 선산 등)
조직: 훈련대장 정창도
지형: 바로 인근이 도양목장 공해가 있었고 녹도진이 있었음.

고흥농민군은 1차 농민전쟁 후 이렇게 군사 조련장을 설치하고 집강소 운영을 하는 동시에, 2차 농민전쟁을 준비하고 있었다. 고흥동학농민군은 전주성 철수 직후부터 활발하게 군사적 활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다른 동학농민군들과 마찬가지로 귀향 후 해산을 한 것이 아니라 집단적으로 모여 세력을 더욱 규합했다. 이미 무기고를 탈취하여 무장하였을 뿐 아니라 각 지역별로 군사훈련소를 마련해 군사적 역량을 강화하고 있었다.

훈련장이 설치된 도양읍의 관리는 전라좌수영 관하의 녹도진(鹿島鎭) 관할이었지만 고개를 넘으면 장흥으로 이어지는 뱃길이 있었고 도양목장의 관청도 있었다. 포두면 봉림의 경우도 ‘민재’라는 고개만 넘으면 풍양면으로 이어지고 ‘척치’를 넘으면 도화면으로 이어지는 교통의 요충지였다. 도양목장과 인근 녹도진으로부터 착취를 당하던 도양민들은 동학에 호의적이었고 농민군 조직에 앞장섰다. 이러한 군사 조련장은 집강소시기 집강소의 무력적 운영에 물적 토대가 됐다.

고흥 지역 농민군의 군사 조련장 설치는 고흥의 농민군 지도자들이 독자적으로 판단해 이뤄진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는 고흥 농민군 최고지도자인 류희도의 역할이 높았다. 류희도는 김개남의 최측근으로서 김개남의 지휘를 받고 있었다. 1차 농민전쟁이 끝나고 전주화약이 맺어지면서 전봉준과 김개남, 손화중은 농민군의 진로에 대해 논의했다.

그러나 세 사람은 정국을 보는 견해가 달랐고 특히 김개남은 군사 역량을 그대로 보전할 것을 주장했다. 고흥은 김개남의 영향권에 있었다. 김개남의 뜻을 좇아 고흥 농민군은 1차 농민전쟁의 군사 역량을 고스란히 보전하기 위해 고흥에 두 군데 군사 조련장을 만들었다. 이러한 조련장의 설치는 군사 역량 보전을 넘어서 집강소의 운영에도 효과적이었다.
/최혁 기자 kjchoi@namdonews.com
/정유진 기자 jin1@namdo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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