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천 영호도회소와 힘 합쳐 폐정개혁 실시 앞장

<85. 고흥의 동학농민혁명>
순천 영호도회소와 힘 합쳐 폐정개혁 실시 앞장
고흥지도자 류희도, 김개남 측근 김인배와 남부 지역 장악
1894년 9월 진주성 무혈입성 시 동참, 이후 남원으로 진출
고흥농민군 주력부대 타 지역 출정 시 수성군 농민들 탄압

 

1906년 이전 천도교 고흥교당이 있었던 점암 봉남마을 교당터/고흥문화원 제공
고흥훈 일대 동학의 전파와 농민군들의 활동상이 적혀진 고흥군 천도교 교구역사

■ 집강소기 폐정개혁안

동학농민혁명 당시 호남 지방을 점령한 농민군은 조정과 전주 화약을 맺으면서 개혁안을 요구했다. 모두 12개의 조항으로 이루어진 폐정개혁안의 주요 내용은 신분제 철폐, 과부의 재혼 허용, 부패한 관리 처벌, 세금 제도 개선, 토지 제도 개혁 등이었다. 이 중 일부는 조정에서 갑오개혁을 통해 추진하기도 했다.

고흥도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집강소에서 폐정개혁을 추진했다. 농민군은 집강소를 설치해 부패 관리들을 쫓아내고 지역사회에서 존경받는 동학교도를 선정해 치안과 행정을 담당토록 했다. 물자가 풍부했던 고흥지역은 예로부터 탐관오리의 발호가 심했다. 인사 청탁에 의한 비리와 세금 징수와 관련된 비리도 많았다.

당시 농민군은 과거 행패를 부리던 아전을 협박해 폐정개혁안을 관철시켰다. 농민군은 양반을 잡아다 때리거나 그들의 주리를 트는 형벌을 가했을 뿐 죽이는 일은 없었다. 즉 중죄를 지은 양반이라도 최고형으로 주리를 틀었을 뿐이지 살생이나 곤장, 매질을 금했다.

이는 동학농민군이 인도주의적이었다는 것을 나타내며 농민군의 활동이 인간의 존엄성과 평등을 실현하는 사회개혁운동 수준에 이른 것으로 볼 수 있다. 때문에 양반이나 토호들은 재물을 갖다 바치기도 하고 때로는 동학에 입도하기도 했다.

농민군은 군기고에서 무기를 빼내 들고 마을을 돌아다니며 부잣집을 털기도 했다. 남원의 집강소와 보성의 집강소가 가장 극렬했다고 한다. 민간에서는 “좌상도에서는 남원접이 쓸고 좌하도에서는 보성접이 쓸었다”고 표현하기도 했다. 이러한 사실은 보성군과 인접해 있는 고흥지역의 집강소 운영 실태를 유추할 수 있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특히 집강소를 설치하고 10여 차례나 흥양읍성을 공격하여 점령한 것은 고흥군 농민군의 활동이 왕성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 지방수령의 부재

집강소가 운영되던 시기에 고흥에는 지방수령이 없었다. 곧 지방수령의 부재는 집강소의 일방적 운영을 의미한다. 고흥지역에서 동학이 포교된 배경을 살펴보았을 때 적대적인 관계였던 아전들과의 협의를 통해 집강소를 운영하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특히 당시 현감이었던 조시영은 농민군이 고흥에 돌아오자 읍성을 비웠다. 조시영이 관청이었던 흥양읍성을 비우자, 농민군은 흥양읍성에 있는 군기들을 가지고 무장했다. 조시영은 농민혁명이 끝나가는 1894년 11월 즈음에 이 문제로 조정에서 조사를 받았다.

현감이 없었던 고흥은 행정공백상태가 됐다. 더구나 농민군들이 병부와 인신(印信)을 탈취해 장흥으로 보내버렸기 때문에 공무를 볼 수가 없었다. 농민군은 무장된 상태로 현감이 없던 고흥을 휩쓸었다. 고흥의 행정은 일방적으로 농민군 위주로 운영됐다.

■ 고흥동학농민군의 활약
 

영호도회소 자리.
동학지도자 김개남은 영호남 남부지역을 관할하는 영호도회소를 순천에 설치하고 동학군을 운영했다. 영호도회소는 김개남의 측근인 금구출신 김인배가 책임자였으나 고흥 동학지도자 류희도를 비롯한 고흥농민군이 주력세력이었다. 영호도회소가 들어서있었던 전남 순천시 영동 1번지 일대. 지금은 행동우체국과 생명보험사 건물이 들어서있다.

고흥 동학농민군은 1894년 7월 하순부터 강화된 군사력을 기반으로 주로 주변 지역에 대한 군사적 지원에 집중하고 있었다. 먼저 광양·순천지역을 기반으로 활동하고 있던 영호도회소의 군사적 활동을 지원했다.

7월 26일 영호도회소에서 하동을 공격할 당시 순천 일대 농민군 주력부대에는 류희도가 이끄는 고흥 동학농민군이 합세하고 있었다. 그 시기 순천을 중심으로 광양, 하동 등지에는 전라좌도 중 동부지역을 책임질 조직이 준비되고 있었는데 이 농민군 기관이 바로 영호도회소였다.

영호도회소는 전남 지역 동학농민군의 구심점으로서 지역의 통치권을 장악해 폐정개혁 활동을 주도했다. 전주도회소나 남원의 도회소로부터의 지시 사항을 각 군·현의 농민군에게 전달하는 역할도 했다. 전라도 동남부지역 농민군의 농민군 사령부였을 뿐만 아니라 활동 거점이었다.

류희도는 김개남의 핵심 측근으로 분류되는 지도자였다. 영호도회소를 책임지고 있던 농민군 지도자 김인배 역시 김개남에 의해 발탁된 인물이었다. 당시 김개남은 전봉준과 전라감사 김학진과의 전주화약을 반대했을 뿐 아니라 농민군이 해산을 하면 후일을 기약할 수 없다는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

집강소기 농민군의 군사 조련장은 김개남 - 김인배 - 류희도로 이어지는 조직의 지휘체계에서 나온 것으로 고흥은 영호도회소와 밀접한 관계를 가졌다. 고흥 농민군 지도자 류희도는 집강소기 고흥 농민군의 훈련에 박차를 가하는 한편 김개남과 긴밀하게 협조했다.

김인배를 지도자로 한 영호도회소는 7월 중순부터 하동을 거쳐 경상도로 진출했다. 9월 1일 하동을 공격해 접수했다. 이어서 진주를 무혈 입성했다. 류희도가 지휘하는 고흥 농민군은 6월에 고흥을 출발해 7월 영호도회소 농민군과 함께 하동으로 진출했다. 이후 김개남이 있었던 남원성으로 들어갔다.

/최혁 기자 kjhyuckchoi@hanmail.net

/정유진 기자 jin1@namdonews.com
 

1890년대 전주성 모습.
고흥 농민군은 호남 농민군의 주력부대로 활동했다. 장성 황룡강 전투와 전주성 전투에도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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