겸허하게 받아들인다?

겸허하게 받아들인다?

<형광석 목포과학대학교 교수>
 

형세가 불리하거나 세부득(勢不得)하면, 위정자나 정치지도자가 입에 침도 바르지 않고 전매특허를 낸 양 내뱉는 말은?

‘민심을 겸허하게 받아들인다’, ‘총선 결과를 겸허하게 받아들인다’, ‘국민 뜻 무겁고 겸허하게 받아들인다’ 등으로, 인터넷에서 검색해본 기사의 제목이다. 전자는 청와대가 지난달 12일 촛불시위 대책회의를 한 후 밝혔다는 말이고, 중자는 올해 4·13 20대 총선 개표 결과 과반 의석 확보에 실패한 새누리당 중앙선대위 대변인이 말한 거다. 후자는 박근혜 정부 출범 후 1년 이상이 흘렀고, 한국 현대사의 최대비극인 2014년 4·16 세월호 침몰 사변 직후인 2014년 7·30 재·보궐선거에서 총 15곳 지역구 중 11곳에서 패한 당시 제1야당인 새정치민주연합 대변인이 밝힌 말이다.

입발림이다. 사탕발림이다. 워낙 자주 듣기에 ‘겸허하게 받아들인다’는 말의 무게감은 조금도 없다. 그 말은 진정성과 실천력을 전혀 담지 못한 말장난이다. 가끔 들었던 예전에는 그 말이 거짓에 가까운 줄을 알면서도 악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선한 거짓말(white lie) 쯤으로 간주했다. 지금은 자신의 날카로운 발톱을 겉으로 드러내놓고 뻔뻔하게 지껄이는, 악의가 가득한 거짓말이고 말장난으로 들린다. 오랫동안 묵히는 바람에 구린내 나는 가래떡에 사탕을 바르면 조금은 구린내가 나지 않겠지만, 그 사탕발린 떡을 먹고 나서 배탈로 고생해보고 경험한 사람이 워낙 많은지라, 아무리 사탕을 듬뿍 발라도 그 떡을 금방 알아차린다. 영리한 우리들이 다 학습한 결과이다. 그들이 우리를 그렇게 길들였다. 어떻게 보면, 그들은 자승자박의 신세이다.

우선 겸허(謙虛)가 무슨 뜻인가? 글자대로, 겸손하게 비운다는 뜻이다. 주역 15번 괘의 이름은 바로 지산겸(地山謙)이다. 괘 모양은 평지인 땅 밑에 높고 높은 산이 자리잡은 형상이다. 겸손하다는 뜻이 도출된다. 겸(謙)은 상대방의 처지를 살피고 아울러서(兼) 자기를 말함이니, 자기를 낮추는 겸손을 뜻한다. 겸은 안으로 지극히 높은 덕이 있으면서도 자기보다 못한 자를 윗분으로 하니, 마치 높은 산이 평지인 땅을 떠받치는 형국으로 자신의 능력과 덕을 내세우지 않고 남을 존중하는 마음가짐이고 행위이다.

받아들이려면, 무엇을 해야 하는가? 비워야 한다. 받아들인 것을 넣을 공간을 미리 마련해야 한다. 다행히 공간이 널찍해서 남아돌면 그 공간을 정리·정돈하고, 공간이 꽉 찼다면 몇 가지를 끄집어내어 버리고 공간을 비워야 한다. 말하자면, 받아들임의 전제는 정리·정돈이고 비움이다.

‘겸허하게 받아들인다’고 말하는 사람치고 정리·정돈하여 속 비운 사람을 찾기 어렵다. 속은 전혀 비우지 않고 받아들이겠다고 하니, 그 말은 알맹이가 없다. 컵에 물이 가득 찬 상태에서 새물을 더 받아들이겠다고 하면, 물이 들어가기는 하는가? 새물이 컵에 들어가기는커녕 곧바로 흘러 넘쳐서 컵의 겉은 웅장한 폭포로 보일 거다. 시간이 지나면, 컵 겉은 알록달록한 물무늬로 장식될 거다. 그런 식으로 받아들인다고 한들, 일시적으로 겉만 번지르르할 뿐이다. 또다시 지난번 잘못은 되풀이된다. 재빠른 되돌림이다. 비우지 않으니, 새로운 습성이 체질화할 리 만무하다.

겸허하게 받아들인다는 말이 진정으로 서민들 피부에 와 닿으려면, 위정자가 겸손하게 비우고 또 비우는 행동을 온몸으로 보여줘야 한다. 그런 실천이 즉시 뒤따르지 않는다면, ‘겸허하게 받아들인다’는 말은 태평양 한 가운데 무인도로 귀양 간 말이다. 그렇게 하지도 못할 위인들이지만, 현 위정자 집단이 100번을 100번해서 ‘민심을 겸허하게 받아들인다’고 외친다고 해도 믿을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미 나와 있고 알고 있는 정답을 곧바로(just now) 실천하지 않는 집단은 정의(justice)를 허공에서 찾는 세력이라고 봐도 무방하겠다.

차라리 그냥 ‘받아들인다’고 만 하지, 왜 ‘겸허하게’라는 말을 덧붙이나. 겸허하게 살아가는 서민과 농민, 버리고 비우고 실천하는 수많은 중생의 성정을 흔들어대려고 작심이라도 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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