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흥농민군, 민간 피해 주지 않고 부패관리만 징치

<86. 고흥의 동학농민혁명>
고흥농민군, 민간 피해 주지 않고 부패관리만 징치
3천여 명 봉기했으나 농번기철 하동전투에는 1천500여명만 참가
보성, 태인, 남원 농민군들과 합세해 전라좌도 농민연합부대 이뤄
고흥지도자 류희도 인솔 하에 하동 동학군과 합세 남원으로 진출

■ 동학농민군의 2차 봉기와 흥양읍성
 

흥양현 읍성
전라남도 고흥군 고흥읍 옥하리에 있는 옛 흥양현의 읍성. 전라남도 기념물 제35호.
세종 때 흥양현의 치소를 둘러쌓은 읍성으로, 현재의 읍성은 조선 후기인 1871년에 만든 것으로 추측된다. 흥양읍성은 전형적인 조선 초기 읍성의 형식으로 성벽의 총 길이는 1.7km이며, 지금은 북벽과 서벽의 일부 이외에는 대부분 손상됐다. 현재 남문 터와 북문 터 그리고 서문 터 등 세 군데의 문터가 확인됐고, 옥상 마을 북문 터에서 취송정에 이르는 산등성이에 성벽의 모습이 가장 잘 남아있다.
흥양현 읍성
여지도 흥양현조 흥양읍성에는 읍성 주위 3,800척, 높이 12척, 치성 322, 옹성 2, 곡성 13이라 기록돼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석축 둘레 1,520척, 높이 15척이라 돼있다. 성 둘레와 성 높이가 맞지 않은데 이것은 책의 편찬 당시의 척수가 틀리든지 아니면 오자로 볼 수 있다. 이를 영조척(31.19cm)으로 환산하면 성 주위가 약 1,215m, 높이가 약 3.7 ~ 4.7m이다.

전주화약에 따라 집강소를 설치하고 실질적으로 행정을 총괄하고 있던 동학농민군은 9월에 다시 봉기했다. 그렇지만 고흥농민군은 이보다 훨씬 빠른 6월부터 독자적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이는 고흥농민군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치고 있었던 김개남의 방침때문이었다. 김개남은 전봉준과는 달리 매우 강경했다. 농민군의 전력을 키워둬야 관군과의 전투에서 이길 수 있다며 농민군 군사훈련과 지역장악에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고흥 동학지도자 류희도는 농민군과 함께 1894년 음력 6월 11일 고흥읍을 출발하여 낙안으로 향했다. 하지만 고흥 농민군은 낙안으로 출발하기 전에 흥양읍 성에 들어가 백성들을 괴롭히던 이서(吏胥)들을 징치했다. 이는 읍폐(邑弊)를 시정한다는 차원에서 벌어진 일이지만 혹시라도 동학농민군 주력이 고흥을 비울 때 일어날지도 모를 아전들의 농민군 탄압 행위를 사전에 방지하기 위한 조치였다.

낙안으로 출발한 고흥농민군은 광양을 거쳐 하동에서 광양의 농민군과 무리를 이뤘다. 고흥농민군의 2천여 명이었고 광양의 농민군은 400여 명이었다. 당초 1차 봉기 때 일어선 고흥농민군은 3천여 명이었다. 그러나 2차 봉기 때는 절반 정도의 농민군들만 류희도를 따라 하동과 남원으로 전투를 치르러 갔다. 2차 봉기가 이뤄진 9월은 한창 농사가 바쁜 철이어서 집을 지킨 사람들이 많았다.

고흥 농민군은 흥양읍성을 출발해 낙안목장~광양~하동~구례~남원으로 이동했다. 고흥농민군이 남원으로 이동한 것은 김개남의 남원지역 점령과 깊은 관계가 있다. 김개남은 남원일대 수성군과 맞서 싸울 농민군 부대가 필요했는데 수도 많고 용맹한 고흥농민군은 이에 맞는 농민군 부대였다. 김개남은 고흥농민군의 도움을 받아 1894년 음력 6월 25일 남원 지역을 점령해나가기 시작했다.

특이한 것은 고흥농민군이 남원으로 장기간 이동을 하면서도 민가에는 피해를 주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류희도의 지도 아래 고흥농민군은 쌀과 가축을 빼앗는 행위를 삼갔다. 자료에 따르면 고흥농민군은 기강과 질서가 바로 잡혀있어 민간에게 큰 피해를 주지 않은 것으로 나타나있다. 고흥의 농민군은 부자들과 교활한 아전, 부패한 관리들만 징치했을 뿐 백성들에게는 아무런 피해를 주지 않았다. .
 

서문리 홍교
고흥읍 옥하리와 서문리 여산 마을을 흐르고 있는 너비 8 ~ 9m의 고흥천 위아래에는 200m의 간격을 두고 2개의 홍교가 자리하고 있다. 두 개의 홍교는 각각 흥양읍성의 서벽과 남벽의 일부를 이루고 있었다. 윗홍교인 상류쪽 홍교는 전라 남도 유형 문화재 73호로 지정돼 있으며 높이 4.5m, 길이 8.7m이다.
옥하리 홍교
옥하리 다리는 서문리 다리보다 규모가 더 크다. 용머리를 홍예 내부 중앙에서 돌출시켜 동쪽을 향하게 조각하였는데 눈망울이 뚜렷하며 입안에는 여의주를 머금고 있다. 고종8년(1871년) 흥양읍성을 대대적으로 수축할 때 축조된 것으로 보인다.

■ 고흥농민군의 하동·남원성 진출

1894년 7월 26일 고흥농민군은 류희도의 인솔 하에 하동의 동학군과 합세했다. 섬진진(蟾津鎭)에 있는 병사들을 잡아 곤장을 쳐 혼내주고 하동의 장꾼들과 연합해 관아를 습격, 집강소를 설치했다. 하동의 부사였던 이채연은 겉으로 복종하는 체하면서 농민군을 환대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화개동의 민포군을 동원해 농민군을 광양으로 내쫓았다. 하동의 농민군들은 광양으로 후퇴했고 그곳의 농민군과 합류했다.
순천에 있던 영호도회소 산하의 농민군들은 하동과 진주 전투 등 주로 경상지역 전투에 참가했다. 그러나 고흥농민군은 영호도회소 농민군과는 다르게 남원으로 진출했다. 김개남은 김인배에게 경상도 진출을 명령하고 자신은 남원 앞 교룡산성을 점령한 후 1894년 8월 20일 남원성에 도회소를 설치했다.
류희도의 고흥농민군은 하동진출 후 남원성으로 진격했다. 그는 8월 20일 이전에 교룡산성에 들어가 군기고의 병기를 남원부 내로 옮겨 놓았다. 김개남의 명령으로 교룡산성을 접수한 류희도는 일본군과의 일대접전을 준비했다. 당연히 무기가 필요했다. 고흥농민군은 무기 확보에 주력하면서 관군·일본군과의 전투에 대비했다.
교룡산성을 거쳐 남원성에 입성한 농민군은 고흥농민군만이 아니었다. 보성과 태인, 남원 등지의 농민군들이 합세했다. 징과 북의 장단에 맞춘 동학군의 행렬은 남원까지 80리 길이로 이어졌다고 전해진다. 이들은 군기와 산성무기고를 점령한 후 무기를 모두 빼앗아 무장 했고 남원읍 동헌에 도회소를 설치했다.

■ 흥양현 동헌 존심당(存心堂)

▲ 조선시대 흥양현(興陽縣)의 동헌(東軒)이었던 존심당. 전남에서 유일하게 옛 모습을 간직한 채 남아있는 동헌건물이다. 1739년에 건축돼 1871년에 중건됐다. / 고흥군청 제공

 

존심당은 조선시대 흥양현(興陽縣)의 동헌(東軒)이다. 동헌이란 조선시대 각 행정단위마다 중앙에서 수령이 파견되어 정무를 보던 아사(衙舍)를 말한다. 현재 전국적으로 비교적 원형이 잘 보존된 동헌은 20여 곳에 불과하다. 전남에서는 존심당(存心堂)이 옛 모습을 간직한 채 남아있는 동헌이다. 호남읍지(湖南邑誌) 8책(1871년) 신증흥양지 관아조(新增興陽誌 官衙條)에는 건물의 연혁이 비교적 자세히 기록돼 있다. 이에 따르면 현감 김시걸(金時傑)이 재임 시인 1739년(영조 15)에 건축했다.
정면 5칸, 측면 3칸의 단층 팔작집이다. 평면 구성은 우측 뒤편으로 온돌방 3개(4칸 규모)가 설치돼 있다. 나머지는 모두 우물마루를 깐 대청으로 처리했다. 기단은 장대석(長大石) 2벌대 쌓기로 돼 있고 초석은 다듬은 원형 초석을 놓았다. 기둥은 원통형 두리기둥을 사용했다. 기둥머리는 창방(昌枋)으로 결구했으며 그 위로는 주간(柱間)마다 화반(花盤)을 1구씩 배치했다.
1987년 6월 16일 이 건물을 해체 복원할 때 중건 상량문이 발견됐다. 맨 앞에 ‘존심당중건상량문숭정오신미중춘하한 지현 완산이덕순서(存心堂重建上樑文崇禎五辛未仲春下澣 知縣 完山李德純書)’라 써져있다. 끝에는 ‘동치십년신미이월십일일묘시수주동월이십오일사시상량, 성조도감 송두홍 감관 오갑조 서춘대 색리 이용록 김치홍 신언구 사령 정정운 도편수 이선유 부편수 김춘삼(同治十年辛未二月十一日卯時竪柱同月二十五日巳時上樑, 成造都監 宋斗洪 監官 吳甲祚 徐春大 色吏 李鎔祿 金致洪 申彦求 使令 鄭正云 都片手 李善有 副片手 金春三)’이라 적혀있다.
이 기록에 의하면 세워진 뒤 150년이 지나서 고종 8년(1871)에 다시 중건됐음을 알 수 있다. 존심당과 같은 축선상의 전면에 위치하고 있는 고흥아문(高興衙門)은 옛 흥양 동헌(興陽東軒)의 출입 정문이다. 보통 지역 명에 ‘아문(衙門)’이란 명칭이 붙는 이 문은 내삼문(內三門)의 성격을 갖는 문으로 현재 전국적으로 몇 곳 밖에 현존하고 있지 않다. 정문인 아문은 3칸 모두 판자문을 달았으나 현재는 사용하지 않고 있으며 조선시대 전형적인 소슬삼문으로 옛 삼문의 형식을 원형대로 간직하고 있다. ‘건륭삼십년’ 이라는 명문이 있는 기와편이 발견돼 영조 41년(1765)에 건립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최혁 기자 kjchoi@namdonews.com
 /정유진 기자 jin1@namdo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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