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중한 친구들 그리고 기억들….

소중한 친구들 그리고 기억들….

<박상신 칼럼니스트>
 

며칠 전, 재경(在京) 고교 동문 송년 모임이 있었다. 하얀 머리칼을 나부끼는 초로(初老)의 선배들, 오십이 훌쩍 넘은 친구들의 얼굴엔 그 옛날 학창시절의 그리웠던 기억이 주마등처럼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70·80년대 암울했던 시절, 그래도 낭만과 꿈, 열정과 패기만으로 숨 가쁘게 달려온 사내들이자, 가장의 모습이었다. 이젠 추억 속 조각난 퍼즐을 찾으려 서로의 안부를 묻는, 어찌 보면 아플 겨를도 없이 힘겹게 달려왔을 이 시대의 가장이자, 아버지들이다. 어느 새 그들의 얼굴에서 연륜(年輪)이란 무게가 무겁게 느껴지고 있었다.

가족들을 위해 묵묵히 살아온 삶, 낯선 서울이란 아수라에서 살아남으려 발버둥 친 그들의 얼굴엔 어느 새 짙은 주름 꽃이 훈장처럼 피어나고 있었다.

예쁜 딸, 자랑스러운 아들의 아버지로 살아온 동문 선후배 그리고 친구들의 얼굴엔, 그날만큼은 세상의 시름도 잊은 채 수십 년 전 기억 속 개구쟁이로 변신해 있었다.

기억한다는 것, 그리고 추억을 가슴에 간직한다는 것은 크나큰 기쁨이자 행복이다. 시간이 흐르자, 그들은 누가 먼저라 할 것도 없이 교정의 기억 열차에 동승하고 시간의 강을 거슬러 가슴 속 어딘가에 영원히 머무른 과거의 교정으로 출발하고 있었다. 기억의 저편, 아직도 아스라이 생각나는 그 교정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어느덧 교정을 떠나 서울이란 낯선 황무지를 개간한 지 언 40여 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동안 강산은 네 번이나 변했다. 하지만 희로애락(喜怒哀樂)의 사계절을 몸소 체험한 그들은 무쏘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는 스승의 가르침을 묵언으로 실천하며 서울이란 황무지를 개간했다. 열과 성을 다해 눈물 어린 그들만의 자긍심이란 나무를 심고 보살폈다. 그 결과 이제는 각계각층에서 알찬 열매를 수확하듯 이곳에 모여 흥겨운 축제를 벌였다.

동문 선후배의 흥겨운 술잔치, 그 속에 피어난 어린 시절의 추억들이 수많은 불빛 되어 광화문 거리를 밝히고 있었다. 공식 모임을 마치고 헤어지기 아쉬웠는지 그들은 삼삼오오 무리 지어 인근 대폿집으로 향했다.

2차로 이어지는 친구들의 만남은 쉽게 꺼지지 않는 촛불처럼 그들만의 이야기꽃을 피워나갔다. 마치 30여 년의 세월을 거슬러 올라간 듯, 대폿집에는 어느 새 교실 속 친구들이 둘러앉아 현실의 버거워진 삶을 재치있는 유머로 웃어넘기는 교실로 변했다. 각자 일어나 간단한 건배사를 외칠 때 그 짧은 인사말에선 저마다 살아온 삶의 진한 애환이 묻어있었다.

누군가를 기억한다는 것, 누군가에게 기억된다는 사실은 얼마나 아름다운 소통의 모습인가. 소통이 실종된 지금의 시대, 그래도 공감할 수 있는 친구가 존재한다는 것만으로도 사람들은 큰 위안을 얻는다.

아직도 기억 열차는 친구들이 머문 교정 곳곳을 누비고 있었다. 검도를 배웠던 체육관, 각자의 교실, 선생님의 향기가 머문 교무실, 그리고 친구들의 땀이 밴 운동장과 교정의 뜰, 이 모든 것이 아련한 추억처럼 피어올랐다. 하지만 가끔 불귀의 객이 된 친구의 소식을 접할 때면 친구들의 소주잔은 슬픔으로 채워지고 있었다. 그곳은 시간이 멈춘 아름다운 공간이었다. 광화문 허름한 대폿집에선 빨라진 디지털 세상을 거부라도 하듯 추억 시계가 멈추고, 술잔속엔 추억이란 별이 쏟아지고 있었다.

소중함이란 무엇인가. 되묻고 싶었다. 그 해답은 감히 기억되고 기억하는 것이라 얘기하고 싶다. 친구들과의 소중한 만남 후, 헤어짐도 이처럼 슬픈 일이거늘 하물며 광화문 거리를 헤매는 세월호 아이들의 슬픈 영혼은 어느 누가 달래줘야 하는가! 조속히 진실을 밝혀야 한다. 모임을 마친 후 택시를 기다리는 내내 광화문에 널브러진 세월호 천막이 바람에 흩날리고 있었다. 지금은 진보와 보수의 싸움이 아닌 선(善)과 악(惡)의 싸움이다. 상식이 지배하는 세상에 살고 싶다. 오늘 밤에도 세월호의 차가운 기억 교실에는 수백 아이의 구슬픈 곡성이 메아리친다. 아이들은 무엇 때문에 죽어야 했는지 의문도 모른 채 서럽게 울고 있으리라. 이제라도 잘못된 역사를 바로잡아야 한다. 그것만이 우리 기성세대가 해야 할 역사적 책무이자, 사명임을 기억해야 한다. 오늘도 기억의 바람이, 진실의 바람이, 광화문 거리에 불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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