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농민군의 후방 보급기지 역할을 맡은 담양

<90. 담양의 동학농민혁명>
동학농민군의 후방 보급기지 역할을 맡은 담양
1861년 동학 전파된 남원과 인접해 있어 1881년 동학 전해진 듯
동학농민혁명 당시 김개남 도와 전라도 농민군 식량과 물자 조달
남응삼 등 담양동학지도자 고비마다 주력부대 지원하며 불씨 살려

■ 담양 동학농민혁명군의 동향
 

동학농민군과 수성군 측이 전투를 벌였던 용구동 뒷산(현 담양군 수북면 주평리)
멀리서 바라본 용구동 뒷산 모습

1894년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났을 때 담양지역은 담양도호부와 창평 현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무장기포 이후 백산대회에 담양지역 농민들도 적극 참가했다. 특히 담양은 동학세가 강했던 전북 남원과 가까워 동학교도들의 수가 상당했다. 담양지역 동학교도들은 남원과 장성에서 벌어진 전투에 계속 참가했고 많은 기여를 했다.

1894년 3월 고부 백산기포시 담양에서는 남주송, 김중필, 이경선, 황정욱, 윤용주, 김의안 등이 참여했다. 1894년 4월 고부 황토현전투시 담양에서는 국인묵이 병졸을 이끌고 전주감영군 측에 합세해 농민군과 맞서 싸웠다. 고부 황토현에서 패한 뒤 국인묵은 가까스로 살아남아 다시 담양으로 돌아왔다. 전주화약 이후 6월 2일 농민군 40여 명이 정읍에서 담양으로 들어와 수성청에 불을 지르고 수성별장 국인묵의 집을 부쉈다.

전주화약 이후 농민군들은 각자의 고향으로 돌아가 폐정개혁을 실시하기 위한 집강소 활동을 했다. 전봉준은 담양 등 전라도 지방을 순행하며 폐정개혁운동을 주도했다. 담양의 농민군 가운데 가장 강력한 조직은 용구동접(龍龜洞接)이었다. 용구동접은 현재 담양의 수북면 주평리 일대이다.

이들은 용구동접을 기반 삼아 매우 활발하게 활동했다. 관군 측 기록을 보면 “동학에 빠져들지 않은 자가 거의 없었으며 흉도들이 각 집을 찾아가 동학 입문을 강력히 권유하는 한편 밖에서는 독을 품고 활개 쳤다”고 나와 있다. 매천 황현은 오하기문에서 담양의 용구동접에 대해 “남원의 화산당접과 함께 강접(强接)이며 잔인하다”고 적었다.

동학접주 이장태(李長泰)는 담양과 태인에서 활발하게 활동했다. 그러나 대나무 산지로 유명한 담양 출신인 그는 이 아무개로 불리며 변변한 이름조차 갖지 못했다. 아마도 그가 대나무 장인(匠人)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전라북도 태인을 관할했던 대접주 손화중(孫和中)과 관련돼 태인에서 활발한 활동을 했고 장성 황룡싸움에 참가해 장태전술로 승리를 이끌었다.

이장태를 비롯한 담양의 동학농민군들은 손화중과 밀접한 연계아래 장성 황룡싸움에서 승리의 원동력을 제공하는데 크게 이바지했다. 이들은 전주 공격에도 적극적으로 가담했다. 이들이 농민군으로 활동하고 있던 음력 5월 2일 양호초토사 홍계훈은 담양부에 농민군 진압에 투입할 포군(砲軍) 300명을 징발했다. 창평에서는 음력 4월 초순에 군대와 포군을 징발해 태인과 부안으로 보냈다.
 

현재 창평 국밥집 거리 일대는 동학농민혁명 당시 체포된 농민군들이 처형된 장소였다.

■ 담양지역의 동학전파

최제우는 그가 깨달은 무극대도(無極大道)를 동학이라 칭하고 1861년부터 포교에 나섰다. 그러나 탄압을 받자 1861년 11월 남원으로 피신해 서공서라는 사람의 집에 머물며 동학을 전하기 시작했다. 이후 서공서가 어떻게 동학을 전했는지에 대한 기록이 전혀 없기 때문에 전라도 지역에서 동학이 어떻게 전파됐는지 추정하기 어렵다.

하지만 최제우의 도통을 계승하여 동학 교문의 지도자로 등장한 해월 최시형이 1880년대 경상, 강원, 충청 지역의 산간에까지 동학을 전했다는 점에서 전라도 남부지역에서도 포교활동을 했을 것이다. 따라서 남원 서공서로부터 시작된 전라도 사람들의 동학 입도는 1880년대 말까지 은밀히 진행되다가 1890년대 초부터 공개적이고 활발하게 이뤄졌을 가능성이 크다.

앞서 밝힌 대로 전북지역에는 1880년대에 동학이 널리 전파됐다. 천도교회월보 등 각종 기록에 따르면 동학이 전남 서해안 지방에 퍼지고 동학에 입문한 이들이 각 지방에서 유력한 동학접주로 등장한 시기는 1891년부터 1893년 사이다. <부록 천도교 장흥군종리원> 자료에 따르면 장흥지역 동학농민군 지도자로 이름을 떨친 이인환, 이방언 등이 동학에 입문한 것은 1891년이다.

담양지역에 언제 동학이 전파되고 동학에 입문한 사람들이 생겼는지는 정확히 전해지지 않는다. 그러나 담양이 전라도지역에서 가장 먼저 동학을 받아들인 남원과 인접해 있는 지역이라는 점에서 1891년 이전에 담양에 동학이 전파된 것으로 보인다.

담양 농민군의 동학 세력은 임실, 태인, 남원에 뒤지지 않았다. <천도교회월보 환원록>에 의하면 1892년에는 담양면 백동리(栢洞里) 김학원(金學元)과 무면(武面) 성도리(成道里) 추병철(秋秉哲)이 입도했다. 1894년에는 용면(龍面) 복용리(伏龍里) 전오봉(全伍奉)과 수북면(水北面) 남산리(南山里)의 황정욱(黃正旭), 송구진(宋樞鎭)이 입도했고 1889년에는 고서면(古西面) 보촌리(甫村里) 최수선(崔洙善)이 입도했다. 1894년에는 남응삼(南應三, 南周松), 김중화(金重華), 이경섭(李璟燮), 황정욱(黃正旭), 윤용수(尹龍洙), 김희안(金羲安), 이화백(李和伯) 등 접주들이 기포(동학의 조직인 포를 중심으로 봉기)했다.

전북이 동학혁명의 근원지였다면 전남은 껴져가는 동학혁명의 불씨를 살리기 위한 최후의 항쟁지였다. 담양은 그 지리적 위치 때문에 옥과, 구례와 함께 농민군들의 배후 지원 장소였다. 또한 위기 때마다 전투력을 보강시켜주는 곳이기도 했다.
 

용구동 주평마을 입구
현재 담양 용구동에는 쪽재골 전원마을이 들어서 있다.

/최혁 기자 kjhyuckchoi@hanmail.net

/정유진 기자 jin1@namdo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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