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응삼 휘하 800여명 담양농민군 남원·운봉전투에서 대활약

<91. 담양의 동학농민혁명>
남응삼 휘하 800여명 담양농민군 남원·운봉전투에서 대활약
남응삼 典糧官 직책 맡아 남원성 점령 후 농민군 군수물자 조달
운봉전투에서 수성군 박봉양의 매복에 걸려 담양농민군 큰 피해

■ 담양농민군의 활동
 

담양농민군의 주 근거지였던 용구동에 세워진 동학농민혁명군 전적지 기념비
담양군과 담양향토문화 연구회는 지난 2007년 11월 용구동에 전적지 기념비를 세웠다. 기념비에는 ‘1894년 12월 5일 담양군 수북면 용구동 대곡 두 곳에 동학농민군이 조, 벼 80여 석을 저장한 곡식을 담양, 순천 양 의병소에 나누어 주다’라고 쓰여 있다.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전주화약 이후 담양농민군들 역시 각자의 고향으로 돌아가 집강소 활동을 했다. 담양 농민군 가운데 가장 강력한 조직은 용구동접(龍龜洞接)이었다. 용구동접은 현재 담양의 수북면 주평리 일대를 기반으로 하고 있었다.

용구동접 동학도들은 매우 활발하게 활동했다. 관군 측 기록을 보면 “(용구동 일대에는)동학에 빠져들지 않은 자가 거의 없었으며 흉도들이 각 집을 찾아가 동학 입문을 강력히 권유하는 한편 밖에서는 독을 품고 활개 쳤다”고 쓰여 있다. 매천 황현은 오하기문에서 담양의 용구동접에 대해 ‘남원의 화산당접과 함께 강접(强接)이며 잔인하다’고 적었다.

김개남의 심복이었던 담양 접주 남응삼(南應三)은 김개남의 최측근으로 활동했다. 남응삼은 담양의 가장 대표적인 농민군 지도자였다. 그를 따르는 농민군의 규모도 최소 800명으로 상당했다. 특히 김개남의 신임이 대단해 곡식을 조달하는 전량관(典糧官)으로 활동했다.

그는 김개남을 따라 1894년 음력 6월 25일에 남원을 점령할 때도 함께 했다. 김개남과 남응삼, 진안 출신의 이사명(李士明)은 남원 출신의 김홍기(金洪基), 김우칙(金禹則), 이춘종(李春宗), 박정래(朴定來), 박중래(朴仲來), 김원석(金元錫) 등과 남원읍성을 점령했다.

이들이 남원을 점령할 당시 남원부사 윤병관(尹秉觀)은 달아나고 없었다. 김개남 등은 손쉽게 남원을 점령했고 남원의 동학교인들과 농민들로부터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이들은 남원을 기반으로 장차 운봉을 함락한 후 경상도 지역으로 진출하려 했다.
 

남원 교룡산성(蛟龍山城)
교룡산성에는 동학농민군을 토벌하려는 관군과 수성군이 주둔하고 있었다.

김개남이 남원을 점령한 이후 남응삼은 그곳에서 생활하면서 7월 15일과 8월 25일에 열릴 남원 농민대회의 경비를 조달했다. 또한 군수물자를 확보하기 위해 1894년 음력 11월 운봉을 공격하기에 앞서 장수를 점령했다.

음력 9월 하순 정석모는 담양으로 돌아가길 원하는 국기춘과 짜고서 김개남에게 5영제(五營制)를 건의했다. 남원을 전라좌도의 본영으로 삼아 5개의 군영으로 나누어 관장하는 방안이었다. 당시 김개남은 남원에 웅거하여 전라좌도를 통할하고 있었으나 각 군현은 그의 지시를 잘 이행하지 않았고 백성들을 괴롭히는 농민군도 생겼다.

이 때문에 주요 지역에 5개의 군영을 설치해 규모가 큰 포(包)의 접주가 담당 군현을 관할하게 하는 방안을 김개남에게 제시했다. 각 영이 관할하는 구역에서 만약 사건이 발생하면 즉시 서로 후원하며 서로 의지할 수 있는 좋은 제도라는 점을 부각시켰다. 남원에서 활동하던 대부분이 5영제를 지지하였으므로 김개남 역시 승인했다.

음력 9월 하순 남응삼을 비롯한 국기춘 등은 담양으로 돌아왔다. 남응삼을 호위하거나 보좌하던 성찰과 동몽, 담양의 농민군들도 함께 돌아왔다. 남응삼은 덕망이 있었으며 주민들을 괴롭히지 않아 지지를 받았다. 그는 부사에게 모든 행정을 일임하고 간섭하지 않았다.

전봉준과 김개남을 중심으로 한 농민군들이 본격적으로 2차 봉기를 준비하자 담양의 농민군들도 분주해졌다. 남응삼의 담양농민군들은 음력 10월 14일 남원을 출발한 김개남의 농민군을 대신해 남원을 지켰다. 남응삼은 김개남의 개선을 기대하며 농민군을 데리고 남원으로 출발했다. 그런데 국기춘과 정석모 등은 김개남의 패배를 예상하고 남응삼을 차츰 멀리하며 농민군으로부터 이탈했다.

음력 10월 14일 김개남이 전주를 거쳐 북상하자 열흘 뒤인 24일에 남원은 박봉양이 이끄는 약 2천 명의 수성군에게 점령당했다. 그러나 박봉양군이 철수하자마자 유복만, 남응삼, 김홍기, 김우칙, 이춘종, 김원석 등의 농민군은 곧바로 남원성을 되찾았다. 이들은 남원의 각 면방별(面坊別)로 군수물자를 할당해 징발했다. 농민군은 미곡, 짚신, 담배, 솜, 가죽, 대나무, 삼베 등을 주로 거둬 창고에 저장하고 부족한 물자는 상인들로부터 징발해 군복과 깃발 등을 제작했다.

이들은 신중하게 계획을 세우고 충분한 군수물자를 확보해 운봉 공격에 나섰다. 남응삼의 농민군을 주축으로 장수를 점령해 부족한 물자를 보충했고 운봉을 지키고 있는 박봉양의 수성군을 위협했다. 음력 11월 13일 남응삼 등은 유복만의 부대와 합류해 남원군 산동방(山東坊) 부동촌(釜洞村)에 주둔하며 운봉을 공격할 채비를 갖췄다. 박봉양은 이 사실을 눈치채고 14일 새벽 2천여 명을 끌고 관음재를 넘어 산동방 부동촌에 가까이 접근해 농민군을 유인했다.

부동촌에 주둔한 농민군 가운데 남응삼 부대와 남원 관노(官奴) 출신의 김원석 부대는 전후 2개의 부대로 나누어 수성군을 공격했다. 수성군이 거짓으로 패한 척하며 달아나자 거침없이 밀고 쫓아가던 농민군은 수성군의 복병에 걸려 크게 패했다. 접주급 지도자 이용우(李用右), 박중래(朴仲來), 고한상(高漢相), 조한승(曺漢承), 황경문(黃京文) 등이 전사하고 일반 농민군 병사들의 희생도 매우 많았다.

음력 11월 하순 농민군들은 남원으로 물러나 4천여 명의 농민군을 재편하며 대책을 세웠다. 유복만은 1천여 명을 인솔해 군수물자를 징발하기 위해 곡성으로 갔다. 남원 읍내에는 약 3천 명의 농민군만이 주둔했다. 이를 눈치챈 박봉양은 28일 농민군이 돌아오기 전 남원읍성을 기습 공격했다.

농민군은 온 힘을 기울여 싸웠으나 수많은 전사자와 부상자를 남긴 채 남원읍성에서 물러나야 했다. 남응삼 등 탈출에 성공한 몇몇 농민군 지도자는 뿔뿔이 흩어져 겨우 살아남았다.
 

용구동 뒷산으로 올라가는 길.
지금 용구동 뒷산에는 용천사자비암이 자리하고 있다.
창평초등학교
예전에는 창평 관아가 자리하고 있었다.

/최혁 기자 kjhyuckchoi@hanmail.net

/정유진 기자 jin1@namdo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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