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기문과 철종

반기문과 철종

<최혁 남도일보 주필>
 

조선 제25대 왕인 철종(哲宗)은 난데없이 왕위에 오른 인물이다. 철종의 이름은 변, 초명은 원범이다. 이 변의 할아버지는 사도세자의 아들이자 정조의 이복동생인 은언군(恩彦君) 이인(李인)이다. 아버지는 은언군의 아들 이광(李壙)이다. 이광의 형 이담(李湛)이 홍국영사건에 연루돼 역적으로 몰려 죽으면서 온 집안이 강화도로 쫓겨 갔다. 순조의 배려로 한양으로 돌아왔으나 역모에 휩쓸려 다시 강화도로 유배됐다. 1844년의 일이다.

당시 이 변은 14살이었다. 그는 산에서 나무를 해 생계를 이어갔다. 농사도 지었다. 비참하게 생활하던 그가 5년 뒤인 1849년 별안간 왕위에 오르게 된다. 헌종이 후사 없이 죽자 순조 비인 순원왕후가 그를 왕으로 만든다. 혹시라도 풍양 조씨들이 다시 발호할까봐 염려해 미리 선수를 친 것이다. 순원왕후는 안동 김씨 김조순의 딸로 순조 2년인 1802년에 왕비가 된 인물이다. 철종 즉위년인 1850년부터 권세를 누린 김좌근(金左根)이 그녀의 남동생이다.

안동 김씨들은 허수아비 철종을 내세워 놓고 마음껏 권력을 누렸다. 그들은 철종 2년에 김조순(金祖淳)의 7촌 조카 김문근(金汶根)의 딸을 왕비로 들였다. 순조, 헌종, 철종 세 임금의 비를 모두 가문에서 배출한 안동김씨의 세도는 하늘을 찔렀다. 국구(國舅; 임금의 장인)가 된 김문근과 1853년부터 10년 동안 영의정을 세 번이나 지낸 김좌근은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다. 정치기반이 없는 강화도령을 왕으로 내세웠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UN에서 돌아온 반기문은 ‘강화도령’과는 처지가 다르다. 강화도령은 농투성이였다가 궁궐로 들어가 덕완군으로 책봉돼 순조와 순원왕후의 양자가 됐다. 그러나 반기문은 8년 동안 유엔 사무총장으로 일하다가 화려하게 서울로 돌아왔다. 대선출마도 하기 전에 20%를 넘는 지지 도를 확보했다. 곳곳에서 러브콜이 이어지고 있다. 그를 간판스타로 내세우면 대선승리가 가능하다는 속셈에서다. 반기문을 불쏘시개로 삼아 자신이 등극하겠다는 잠룡들도 있다.

그러나 강화도령과 처지가 같은 점도 있다. 그를 보호해주는 측근들이 없다는 것이다. 그 얼굴이 그 얼굴인, 국내 정치인들에게 질린 민심이 ‘신선한 반기문’에 열광하고 있지만 그 ‘열광’을 표로 연결시켜줄 인적자원이 넉넉지 않다는 것이다. 그래서 반기문은 과거 권세를 휘둘렀던 인물들이 자신의 곁으로 몰려드는 것을 마다하지 않고 있다. 그래서 지금 반기문의 주위에는 MB정권 인사들 일색이다. 심지어 친박 인사까지도 있다.

순원왕후 격이었던 박근혜 대통령은 과거 김무성 전 대표를 중심으로 한 비박계 인사들의 발호를 끊기 위해 ‘반기문 카드’를 꺼내들었다. ‘권력이 계속해서 자신들에게 있으니 새누리당 의원 여러분 까불지 마세요’라는 경고였다. 친박들의 행태는 풍양 조씨들을 견제하기 위해 강화도령을 데려와 왕으로 만든 안동 김씨와 닮은 꼴이었다. 친박들은(혹은 보수 세력들은) 불과 몇 달 전만 하더라도 이명박-박근혜-반기문 3대로 이어지는 권력승계를 꿈꿨다.

그러나 보수 세력의 희망사항이었던 ‘3대 권력승계’는 최순실 국정농단사태로 이미 물 건너 간 상태다. 안동 김씨의 발호로 ‘이씨조선’이 ‘안동 김씨의 조선’이 됐던 것처럼 최순실 일당의 발호로 ‘박근혜의 정부’가 아니라 ‘최순실의 대한민국’ 이었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차기의 권력창출 구도가 모두 바뀌었기 때문이다. 이에 반기문은 박대통령을 공격하고 친박과 거리를 두고 있다. 그러면서 과거 권력(MB맨)의 접근을 의도적으로 용인하고 있다.

만에 하나라도 반기문이 대선에서 승리하면, 이런 인적요인 때문에 반기문 정부는 가장 권위적이고 귀족적인(반서민적인) 정부가 될 가능성이 높다. 왜냐하면 반기문 본인이나 주변 인물들 대부분의 인생역정이 희생적이었다기보다는 출세지향, 혹은 권력지향으로 점철돼 있어서이다. 그들은 대한민국의 민주화에 특별히 기여한 것도 없고, 가문과 학벌에 힘입어 탄탄대로, 양지만을 쫓아갔던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UN도령’이 대통령의 자리에 앉을 지 여부는 그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 그러나 안동 김씨와 풍양 조씨의 권력다툼이 강화도령을 철종이 되게 한 것은 분명하다. 안동김씨는 강화도령에게 왕의 자리를 준 대신 그를 쥐고 흔들었다. 정치 신인 반기문도 옹위세력에 놀아날 우려가 높다. ‘세도벌열안동풍양’(勢道閥閱安東豊壤). ‘최고의 권력을 휘두른 가문은 안동 김씨와 풍양 조 씨다’라는 말이다. 대한민국은 계속해서 영남 패권주의에 휘둘릴 것인가?

능력과는 관계없이 왕족이었다는 이유만으로 왕이 된 철종, 아무런 것도 검증된 것이 없는데도 UN사무총장이었다는 이유만으로 대통령 자리를 넘보는 반기문. 그 반대편에는 또 다른 권문세가(權門勢家;친 문재인 패권세력)가 자리하고 있는 대한민국. 그리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 ‘애매한 호남’. 이게 불행인지, 다행인지, 역사의 반복인지, 역사의 반동인지, 가늠하기가 힘든 나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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