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안정성을 보장하는 정치

삶의 안정성을 보장하는 정치

<유근기 전남 곡성군수>
 

지난해 우리는 경악을 넘어서서 대한민국 국민이라는 사실이 몹시 창피하게 느껴지는 지경에까지 이르렀었다. 너나없이 무척 힘들었고 ‘이러려고 대한민국에 태어났나’ 하는 자괴감이 들기도 했지만 희망을 얻은 것은 1천만 촛불이 준 감동이었다.

촛불 하나하나에 실린 국민들의 마음이 모여 대한민국의 자존심을 다시 일으켜 세우고 자랑스럽게 만들고 우리 가슴을 뜨겁게 데웠던 것은 평화적인 대규모 촛불시위에 대한 외신들의 감탄 때문만은 아니었다.

국민들의 절망은 민주주의의 역사를 다시 쓰고 있다는 자부심으로 자신의 상처를 스스로 치유하고 있었다. 촛불 물결 속에 우리는 자괴감이 극복되고 희망으로 전환되는 놀라운 경험을 지금도 하고 있다. 그리하여 어떤 어려움과 고통도 힘을 모으면 해결할 수 있다는 자신감에 충만해 있다.

대통령 탄핵소추안이 국회에서 가결되고 권력자들이 줄줄이 특검 수사에 불려 나오는 와중에도 지방정부는 단 한 치의 동요도 없었다. 나라의 근간이 어디 있는지를 우리는 체험하고 있는 중이다. 지방자치가 진정한 풀뿌리 민주주의이며, 지방자치로 나라가 더욱 굳건해지는 연유를 우리는 확인하고 있다.

나라가 잘되면 서울도 지방도 잘되고 우리 곡성군도 잘될 것이다. 그러나 곡성군이 잘됨으로써 전라남도가 잘되고 서울이 잘되고 그럼으로써 나라도 잘되는 순서로 나아가는 게 선진적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방 정부가 더욱 튼튼해져야 한다.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흔들리지 않는다고 했듯이 풀뿌리 민주주의라 불리는 지방자치가 발전하면 나라는 더욱 굳건해진다. 바로 이것이 지방에 더 많은 권한과 재정을 할애해 지방 분권을 실행해야 하는 이유이다.

로버트 퍼트넘 하버드대학 교수의 이탈리아 지방자치 연구는 많은 것을 말해준다. 이탈리아 정치는 오랫동안 중앙당의 폐쇄성과 당파성 때문에 이념적 양극화가 심했다. 그러나 지방자치 도입 이후 지역의 정치 문화가 극적으로 변했다. 대립이 협력으로 변했고, 실용적인 경영 자세가 독단적인 주장을 끌어안게 되자, 지방자치를 통해 관용·실용·합리성 같은 정치 지형이 새롭게 형성됐다.

한국사회의 첨예한 이념 대립 역시 비슷한 양상을 보이고 있다. 모든 단체장들은 지역경제 살리기를 외치지만 지방자치도 중앙 정치의 영향을 벗어나지 못한다. 흑백 논리를 넘어 협상을 지향하는 정치, 합리적 대화를 통해 차이를 조정하는 정치, 지역 차원의 개혁을 통해 통합을 실천하는 정치들이 지자체에서 시도되고 있다.

물론 정치 현장을 바라보는 국민들의 눈빛에는 여전히 자괴감이 가득하다. 우리 수준이 이러한데 어떻게 정치가 좋아질 수 있을까. 하지만 정치학의 논리는 그렇지 않다. ‘좋은 정치가 좋은 시민을 만든다’고 주장한다.

예를 들면, 이탈리아만 그랬던 것이 아니다. 100년 전 스웨덴은 교육 수준도 유럽에서 가장 낮았고 문화라고는 술 마시는 것밖에 없었을 정도였는데, 스웨덴이 지금처럼 바뀐 것은 스웨덴의 정치가 바뀐 다음이었다고 학자들은 말한다.

20년 전 반대와 우려를 무릅쓰고 시행됐지만 이제는 국민 대부분이 지방자치를 ‘당위’로 여긴다. 한국지방행정연구원이 작년에 조사한 것을 보면 국민의 86.8%가 지방자치가 필요하다는데 동의했다.

민선 초기에는 선출된 장이나 의원이 행정 내부 구조·운영 절차를 이해하지 못하고 전문성이 부족하여 군림하고 명령하는 상하복종만 강요하면서 각종 비리와 사회적 지탄을 받는 경우가 많았으나, 민선 제도가 차츰 정착되어 최근에는 그러한 일이 없어지고 대부분의 지자체가 주민으로부터 신뢰를 받고 있다.

주민 참여제도 도입, 자치·분권의식 향상 등 지방자치는 알게 모르게 민주주의 발전에도 크게 기여했다. 중앙집권적 사고나 관 주도형 사고에 큰 변화를 불러왔다. ‘미래 사회의 최고 가치는 다양성이기 때문에 미래의 정치질서는 지방분권’이라고 단언한 앨빈 토플러의 말이 우리 사회에서도 실현되고 있다.

물론 지방의 중앙 종속 현상으로 지방자치는 아직 완전하지 않다. 자치사무나 단체위임사무의 경우 문제될 여지가 크지 않지만, 기관위임사무의 경우 지방자치단체장을 중앙의 하위 행정기관 지위에서 위임을 하게 된다. 지방자치 이념을 침해할 소지가 있다. 이러한 이유로 일본에서는 장기간에 걸쳐 기관위임사무 폐지를 추진하였고 지금은 완전히 사라졌다. 한국의 경우는 자치사무와 기관위임사무가 대부분이다.

재정여건은 더 심각하다. 대한민국 지방자치단체는 그 지역이 돈이 얼마나 많은 지역이냐에 따라 편차가 크다. 서울 강남구 같은 경우는 인터넷 강의 사업에까지 뛰어들었고, 과천시는 시에서 직접 버스를 운행하는 반면, 충청북도 어느 군의 경우는 돈이 없어서 유지 자체가 힘들 정도라고 한다. 공무원들에게 임금조차 주지 못 할 뻔한 사태도 있었다.

자치단체로 각종사업이 이양되고 복지 부담이 갈수록 무거워지는데 조세 총액 중 지방세가 차지하는 비중은 1995년 이후 변화가 없다. 세금에서 대부분의 세목을 국세로 지정해놓고 지방세 항목이 많지가 않아 정작 중앙정부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형태로 법이 짜여 있다.

서울특별시, 인천광역시, 울산광역시 등을 제외하면 많은 지자체들이 재정자립도가 50%조차 넘지 못하여 중앙정부의 교부세와 보조금에 의존해야 하는 게 대한민국 지방자치제도의 현실이다. 당연히 교부세와 보조금에 의존하게 되면 지방자치단체의 행정이 중앙정부에 구속될 수밖에 없다. 지방자치단체에서 무슨 사업을 하려 해도 중앙정부에서 교부세와 보조금을 주지 않는 방법으로 뒤집어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중앙정부와 지방정부의 국가 재정 배분 비율이 우리는 8:2, 선진국은 5:5다.

이는 자치단체가 살림살이를 할 때 중앙정부에 손을 벌려야 하는 부분이 갈수록 커진다는 의미이다. 이제 지방에 더 많은 권한과 더 많은 재정을 나눠야 할 때다. 탄핵 정국의 와중에 보여준 중앙정부의 어지러움과 지방정부의 의연함이 그 이유를 잘 설명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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