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군(日軍) 진입으로 전세 뒤집어지자 수성군, 농민군 참살(慘殺)

<94. 곡성의 동학농민혁명>
일군(日軍) 진입으로 전세 뒤집어지자 수성군, 농민군 참살(慘殺)
12월 초 장위영·日軍 곡성 들어오자 농민군 모두 도주
김명국 등 수성군 마을 곳곳 뒤져 농민군 색출해 처형
김개남 조카·농민군 70여명 화약폭발 사고로 숨지기도

 

옥과현지도(玉果縣地圖,1872년 지방지도)
옥과현은 지금의 전남 곡성군 옥과면, 입면, 겸면, 오산면, 삼기면 지역에 해당한다. 읍치(邑治)는 전남 곡성군 옥과면 옥과리 일대에 있었다./서울대학교 규장각

일찍부터 곡성은 남원에 본영을 둔 김개남의 지시와 영향을 받았다. 김개남은 1894년 음력 6월 25일 남원으로 들어가기 직전 곡성에 들렀다. 김개남 휘하의 농민군들은 곡성에 들어와 며칠을 주둔했다. 김개남은 전투를 위해 9월부터 곡성, 남원, 능주, 군산, 함열 등지에서 무기와 전곡, 그리고 군포(軍布) 등을 거두어들였다.

농민군은 옥과에서 1만 3천량을 징발했다. 농민군이 돈과 물자를 거둬들일 때 김개남의 조카가 이끄는 태인접(泰仁接) 농민군 부대가 곡성에 들어와 상황을 점검했다. 이 과정에서 김개남의 조카와 부하들이 화약 폭발사고로 목숨을 잃는 대형사고가 발생했다.

김개남의 조카는 군수물자를 지시한 대로 준비했는지 확인한 후 술자리를 벌였다. 그런데 이때 담뱃불이 화약 가마니에 옮겨 붙어 크게 폭발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이 일로 김개남의 조카를 비롯한 접주급 지도자 7~8명과 태인접에 소속된 농민군 70~80명이 목숨을 잃었다.

12월 장위영(壯衛營) 군대와 일본군이 곡성에 진입했다. 곡성은 다시 관군의 수중에 들어오게 됐다. 수성장 김명국은 복수하는 데 앞장섰다. 이들은 힘을 다해 농민군을 체포해 관군과 일본군에 보냈다. 그런데 12월 이후에 소모소(召募所)로부터 김명국을 붙잡아 올리라는 지시가 향리들에게 내려졌다. 이는 김명국을 시기한 세력의 무고에 의한 것이었다.

12월 20일 김명국을 체포했지만 곡성 유생들이 그를 옹호했다. 그 후 김명국은 수성중군이 되어 5가작통법에 의한 주민 통제의 임무를 맡았다가 순위영의 지시에 의해 순창군으로 옮겨 근무했다. 이교(吏校)였던 신정렬은 선비들의 요청에 의해 호장이 됐다. 나이가 많아 퇴임한 정일훈(丁日熏)은 이방이 됐다.

호장과 수리향 및 수형리 등은 읍성을 지키지 못한 책임을 물어 음력 12월 중순 조정의 지시에 의해 압송됐다. 1895년 이후에는 향리들을 교체했고 다시 부오(部伍)를 편성했다. 이처럼 곡성지역은 반농민군의 갈등과 반목이 심했다.

관군과 일본군은 농민군 지도자를 색출해 처형했다. 도망간 농민군들도 얼마 후 모두 체포됐다. 1895년 음력 1월 이후에는 농민군의 종적을 찾아보기 힘들 정도였다. 농민군 진압에 나선 관군과 일본군은 옥과, 곡성 등지에서 물자를 조달하면서 갖은 행패를 부렸다. 농민군들의 징발에 시달리던 주민들은 다시 또 관군들의 행패에 고초를 겪어야 했다.

특히 장위영 군대는 곡성에 들어가 농민군을 진압한다는 명목으로 주민들을 괴롭혔다. 이에 정부는 1895년 음력 1월 참모관(參謀官), 참모사(參謀士), 소모사(召募士), 소모관(召募官), 별군관(別軍官) 등에게 작폐를 금지하고 해산할 것을 명령했다. 각처에서 일어난 ‘의병’이나 보부상 등에게도 해산을 지시했다. 순무영은 군무아문(軍務衙門)에 다시 소속됐다.

농민군들은 음력 12월 11일을 전후해 해산된 상태였다. 그러나 조정에서는 농민군을 체포하기 위해 마을 곳곳을 포위하고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했다. 당시 농민군 가운데 접주급 지도자들은 이름을 바꾸고 은신했으나 일반 농민군들은 엄격한 검문을 피하지 못하고 체포됐다.

옥과 지역에서도 같이 일이 벌어졌었다. 전라우도를 공격하는 과정에서 옥과현에도 농민군 부대가 들어와 잠시 주둔했다. 1894년 음력 4월 농민군 수천 명이 옥과현의 관아를 점령했다. 이들은 옥과 현감이었던 홍우석(洪佑奭)을 잡아들인 후 무기와 관곡을 징발해 정읍으로 돌아갔다. 음력 12월 7일 양호소모관과 일본군이 옥과에 들어왔다.

옥과에서 농민군으로 활동한 전재석, 김낙유, 황찬묵 등 3명은 전 감찬 유정효(劉正孝)가 주도하는 수성군에게 체포됐다. 유정효가 체포한 농민들은 음력 12월 12일 양호소모관과 일본군에 의해 처참하게 죽임을 당했다. 농민군에게 호의적이었던 옥과 현감 홍우석은 파직됐다.
 

곡성 천주교 성당(감옥 터)
과거 곡성관아의 감옥이 있던 곳이었다.
곡성읍 모습
곡성에서는 농민군과 수성군의 보복이 되풀이됐다. 세월이 흘러 피해 규모를 밝혀내기는 힘들지만 곡성 산하는 그 모든 아픔을 품고 있다.
군청 뒤쪽의 팽나무
군청 뒤 담쪽에 가지가 잘린 채 몸통만 남은 팽나무. 관아 주변에는 으레 팽나무가 심어져 있었다.

/최혁 기자 kjhyuckchoi@hanmail.net

/정유진 기자 jin1@namdo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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