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원농민군 운봉전투 패배로 구례농민군도 와해

<96. 구례의 동학농민혁명>
남원농민군 운봉전투 패배로 구례농민군도 와해
남원농민군 북쪽, 구례농민군은 남쪽에서 박봉양 수성군 협공 계획
북쪽 농민군 패배로 연파리에 집결해 운봉 향하던 구례농민군 해산
운봉전투 후 전라좌도 농민군 기세 꺾이고 수성군 잔인한 토벌 시작

 

농민군이 집결했던 연파리
운봉을 공격하기 위해 구례농민군이 집결해 있었던 광의면 연파리 일대.

순천대 홍영기 교수의 연구에 따르면 농민군은 각 군현을 단위로 진행되는 폐정개혁과 포교 및 군사 활동을 주도했다. 이러한 활동은 집강소나 도소를 중심으로 이뤄졌다. 상당수의 양반이나 향리들이 농민군의 활동에 호의적거나 적극 찬성했다. 특히 구례지역에서 양반 신분에 속하는 사람들이 동학에 들어간 경우가 많았다.

구례 현감을 지낸 남궁표(南宮杓)와 조규하(趙圭夏)가 대표적이다. 남궁표는 구례 농민군의 접주 임정연을 따라 동학에 입도했다. 당촌마을에서 살고 있었던 접주 임정연은 구례 주민들에게 입도를 권유해 많은 사람들을 교인으로 만들었다. 또한 <동경대전>을 열심히 읽으며 진심으로 동학사상을 높이 평가했다.

조규하는 현감으로 재직할 때부터 농민군들에게 호의적이었다. 그는 다른 지방의 농민군을 맞이하고 떠나보낼 때 잔치를 베풀며 환대했다. 그는 임실에서 만난 김개남에게 사촌의 아들을 딸려 보내기도 했다. 그리고 자신도 동학에 입도해 김개남과 서로를 접장이라고 부르며 가깝게 지냈다.

김개남도 조규하에게 편지를 보낼 때 자신을 낮추어 접이라고 지칭했다. 조규하의 경우 농민군이 두려워서 비굴한 자세를 보였다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자신도 동학에 들어가고 조카를 입도시킨 것을 보면 그렇게 볼 수만은 없다. 이들은 농민군의 동학사상과 활동내용 등이 옳다고 판단해 동학에 들어간 것으로 보인다.

구례 농민군은 1894년 음력 11월 남원의 농민군과 연합해 박봉양이 지키고 있던 운봉(雲峰)을 함락한 후 경상남도 지역으로 진출하고자 했다. 이는 북상하는 농민군의 군수물자를 조달하고 경상도 지역으로까지 전투를 확대해 관군과 일본군의 군사력을 분산시키기 위해서였다. 또한 부산을 근거지로 하는 일본 세력을 견제하기 위함이었다.

구례와 남원 농민군들도 영남우도의 북쪽 지역으로 진출해 합류했다. 그들은 독자적인 활동구역을 확보해 경상도에서의 군사작전을 쉽게 전개할 계획이었다. 일부 농민군들은 순천의 영호도회소 농민군들과 함께 진주로 진출했다. 남원에서는 고흥 출신의 유복만과 담양 출신의 남응삼, 남원 출신의 김홍기 등이 중심이 돼 농민군을 지휘했다.

농민군은 먼저 장수를 점령하고 충분한 군수물자를 확보해 유복만 등이 기다리는 남원군 산동방으로 돌아와 운봉 공격을 준비했다. 이들은 구례 농민군 접주 임정연에게 운봉을 협공하자고 권유했다. 구례의 농민군들은 남원의 농민군과 협공 작전을 펼치기로 했다. 구례 접주 임정연은 농민군을 광의면 연파리에 집결시켰다.

기선 제압을 위해 장수를 먼저 공격해 이미 상당한 성과를 거둔 농민군들은 이번이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했다. 남원과 구례의 농민군들은 운봉을 점령하기 위해 신중하게 군사작전을 짰다. 농민군들은 남과 북에서 운봉을 협공할 의도였다. 하지만 박봉양이 지키고 있는 운봉은 빈틈이 없었다.

박봉양은 주민들을 잘 결속시켜 사기가 매우 높았다. 운봉 인근 지역의 아전들과 주민, 양반 가문의 부녀자들은 농민군을 피해 운봉으로 몰려들었다. 호남 지방의 양반과 토호세력, 영남 우도의 군현들은 운봉에 의지했다. 운봉이 무너지면 전라좌도의 군현이 모두 농민군에게 점령당하게 되고 경상도 지역도 마찬가지였다.

농민군은 치밀한 준비아래 1894년 음력 11월 13일 남원 농민군이 산동방 부동촌에 진을 치고 운봉의 민보군은 관음재에 진을 치고 대치했다. 11월 14일 새벽부터 15일까지 방아재에서 운봉의 박봉양 민보군과 접전을 펼쳤다. 남원의 농민군과 운봉의 민보군은 공방전을 펼쳤지만 농민군은 허무하게 무너졌다. 농민군은 요새와 다름없는 운봉을 공격하다가 방아재에서 패하고 말았다.

운봉의 민보군 대장 박문달의 공격으로 농민군은 6개월 동안 차지하고 있었던 남원성을 다시 빼앗겨야 했다. 임정연이 지휘하던 구례의 농민군은 남원지역 농민군이 참패했다는 소식을 듣지 못했다. 그들은 천은사를 거쳐 지리산 자락을 끼고서 가파른 고갯길을 걷고 있었다. 구례 산동면 위안리 부근에서야 패전 소식을 들은 농민군들은 운봉전투에 합세하지 못하고 발길을 돌려 구례로 돌아왔다.

운봉전투의 패배는 전라좌도의 농민군들이 수세로 몰린 결정적인 계기였다. 수세에 몰린 남원의 농민군들은 박봉양의 민보군과 남원의 민보군에게 읍성마저 내주고 말았다. 전라좌도의 농민군 본영이 다시 수성군의 손에 들어갔고 농민군들은 사방으로 흩어졌다. 인접했던 구례의 농민군들도 동요, 살길을 찾아 떠났다. 이후부터 수성군의 잔인한 토벌이 시작된다.
 

구례 접주 임정연이 거주했던 광의면 사직동(현재 당촌마을)
당촌마을 내 사직정
이곳에서 임정연과 동학도들이 계책을 논의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구례현감 남궁표 선정비
구례현감 남궁표가 구례 백성들에게 선정을 베풀었다는 내용이 새겨져 있다.

/최혁 기자 kjhyuckchoi@hanmail.net

/정유진 기자 jin1@namdo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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