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의 기원

종의 기원

<문상화 광주대학교 외국어학부 교수>
 

<종의 기원>은 1859년 다윈이 세상에 발표해 기독교문화의 근간을 흔든 과학책이지만 2016년에 정유정이 발표한 <종의 기원>은 제목은 같지만 내용은 전혀 다른 소설책이다. 사이코패스의 심리상태를 그리는 이 소설은 잔인한 묘사와 섬세한 터치가 어울려 읽는 내내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다. 밤길에서 처음 만난 행인, 그리고 자신의 엄마와 이모를 면도칼로 차례차례 잔인하게 살해하는 주인공을 보면서, 작가는 왜 이런 잔인한 책으로 독자를 괴롭히는지 짜증스럽기도 하지만 다음 내용이 궁금해서 손에서 책을 놓을 수도 없다.

이런 잔인한 내용을 쓰는 이유를 작가는 우리들 속에 내재한 악을 만나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 악을 그리는데 상당한 용기와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에 먼 나라를 여행하고 난 다음에야 비로소 자판 앞에 앉을 수 있었다고 말한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우리가 스스로에게 던지는 질문은 악의 근원에 관한 문제이다. 작가는 한 소년의 성장과정과 그 소년에 대한 사회적 편견이 잠재한 악을 키우고 있음을 보여주지만, 조금만 더 확장하면 그 악은 우리 안에 존재하는 보편적 악에 관한 근원적인 문제에 접근한다.

만약 소년이 어린 시절에 겪었던 형과 아버지의 죽음이라는 치명적인 사건을 주변사람들이 충분히 이해했다면, 확대해서 타인의 불행을 객관적 잣대로 재단하기 전에 그 불행을 이해하려는 노력을 경주했다면 소년과 소년을 둘러싼 가족들의 운명이 조금은 달라졌을 것이다. 당위론적 결론과 그 것을 위해 선별된 객관적 사실이 소년을 반사회적 인격장애자의 길로 내몰지 않았을까?

작금의 우리 사회는 모든 것이 뒤엉켜 한치 앞도 가늠하기 힘든 상황이다. 그 한가운데 촛불과 태극기로 상징되는 두 개의 전혀 다른 힘이 충돌하고 있다. 그리고 그 힘의 근저에는 분노가 있다.

무능한 대통령과 그 대통령 뒤에 숨어서 호가호위하던 그림자들에 대한 분노, 우리들의 신산한 삶과 대조되는 그들의 허영과 편법, 그리고 후안무치에 대한 분노, 그리고 한 세대를 거슬러 올라가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한 분노까지 뒤엉켜 사람들은 광장에 모여 촛불을 태운다. 태극기는 또 어떤가? 자신들의 힘들었던 공과를 인정하지 않는 세대에 대한 분노가, 그리고 이제 세월의 뒤안길로 가야만 하는 자신들의 모습에 대한 분노가 태극기를 통해 분출된다고 생각되지는 않는가?

주인공의 잔인한 행동 뒤에는 분노라는 이름의 악이 숨어 있었다. 그리고 그 분노가 통제되지 않았을 때 엄청난 결과를 불러왔다. 촛불을 들었든, 태극기를 들었든 이제 우리의 행동 속에 또 다른 분노는 없는지 되돌아 볼 일이다. 촛불과 태극기를 통해 정당한 분노가 아닌, 자신의 화가 투영된 분노를 표출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볼 일이이다. 우리의 분노가 정당한 사고를 흐리게 하고 합리적인 행동을 가로막고 있지는 않은지, 그래서 우리 사회 전체를 더욱 격한 상태로 몰아가지는 않는지 다시 한 번 살펴볼 일이다. 만약 있다고 여겨진다면 더 늦기 전에 그 화를 달래야한다.

화를 가라앉히는 일은 생각보다 쉽다.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은 것을 보려 하고, 말하는 것보다 말하지 못하는 것을 들으려 할 때 상대방을 열린 마음으로 바라볼 수 있다. 그리고 그런 눈으로 상대방을 바라볼 때 화가 녹아내리는 것을 경험할 수 있다. 우리 모두는 사실을 보고 있다고 믿고 있지만 그 사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취사선택된 것이기 쉽다. 사실 뒤에 진실이 존재하는 법이지만 그 진실은 언제나 구름 속에 가려져 있어서 신이 아닌 이상 우리가 전체를 파악할 수는 없다. 그러니 주차하기 전에 내 차가 방해가 되지는 않는지 돌아보고, 내 말이 상대방을 조롱하거나 저주하지는 않는지 돌아보고, 내 이익이 정당한지를 돌아보는 것으로도 스스로를 절제할 수 있다. 아울러 상대방에 대한 작은 배려를 첨가할 수 있다면 그 것이 현재 병든 우리 사회 전체를 치유하는 첫걸음이다.

지금 우리가 살고 떠난 자리는 우리의 사랑스런 아이들이 이어받아 살아갈 자리다. 그 자리에는 화가 적고 상대방을 배려하는 사람들이 많이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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