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기의 심란(心亂)했던 한인사회<上>

<오인철 조선대학교 명예교수>
 

미국 윌슨 대통령(Thomas Woodrow Wilson, 28대)은 위대한 리더는 아니었지만 진보주의 선봉장으로서 각 민족 집단이 스스로의 결단 입장서 세계를 이끌어 갈 때, 3·1운동이 일어난 조선도 독립 쟁취로 전 국민이 발벗고 나섰다.

일제(日帝)는 극동 아시아를 삼키려는 군국주의 야망을 펴서, 그 통로인 허약한 조선을 노략질하는데 극성이었다. 한편, 하나님이 망국(亡國) 대한 조선을 중대평양 하와이에 조선 최초 이민(移民)으로 ‘제2의 한국’으로 세워 주신 바 사탕농장 한인 이민 노동자들 애국애족 가운데, 철천지 한(限)인 日帝로부터 벗어날 독립전선서, 두 한국 지도자 우성(又醒) 박용만 소년병학교장과 리승만 사이에 독립 쟁취 방법론상 노선(路線) 싸움이 맹렬했다.

박용만 독립군단장은 그간 이민 한인들의 무장봉기(武裝蜂起)와 다른 한편 리승만의 주장대로 윌슨의 민족자결원칙에 입각한 자유진영의 성원을 확보하면 제아무리 설쳐대는 왜(倭)도 꺾을 수 있단 상반(相反)된 갈등무대로 각축되기 이른다.

그런데 악랄한 승냥이떼 日本은 그 틈새서 노약한 고종에게 소위 대한독립의사 포기를 강요, 한국이 궐기할 기회마저 日帝 악귀(惡鬼) 무리들에 폐위당하고, 독살(毒殺)까지 당한 처참한 조선, 한국민에게 그 장례기간도 불허한 형편이었다.

中國 상해(上海) 임정서는 김규식을 파리 평화회의로 파견, 조선의 입장을 호소토록 했다. 하여 조선 혁명객들은 프랑스 파리에 모인 각국 정치가들에게 조선의 자유 독립을 극적으로 과시했다. 즉 재한(在韓) 일본 사람들과 관헌(官憲)들에게 유혈(流血) 공격기회로 이 장례식을 이용하려고 계획했으나, 결국 평화적인 3·1운동 시위방법이 채택되었다.

잊지 말 것은 조선의 거국적 최초 평화적 저항인 3·1운동 만세사건은 그 원동력이 종교의 영향으로 발로된 애국정신이었다는 사실이다.

한국의 뛰어난 기독교(Christian) 지도자들 중에는 목사 길선주(吉善宙)와 이상재, 천도교 지도자 손병희를 포함, 33인 위원회 구성, 혁명 아닌 독립선언서를 기초(起草), 인쇄해 공포했다. 이는 오직 신앙과 애국심의 결정(結晶), 표현된 선언인 바, 조선(朝鮮) 독립을 찾는 평화적 투쟁이었다.

조선 백성들 100명에 한명씩 꼴로 日帝 관헌이 배치된 극도로 삼엄한 밀정조직이 배치됐음에도 불구하고 전국 방방곡곡서 준비 공작은 비밀리 이뤄졌으니, 하나님께서 도와주신 것이다.

일제(日帝) 악착스런 관헌의 망동(妄動)을 피하며, 그 경계태세를 따돌리고 독립선언 날짜를 앞당겨 1919년 3월 1일 정오(正午), 전국 방방곡곡서 태극기 물결, 일제히 독립만세 시위는 폭발했다.

천지(天地)를 진동시킨 3·1절 거족적 대 시위를 지켜본 미국 세크라멘토 신문(Sacramento News & Review Daily) 발행인 발렌틴 랫취도 “어떤 이상(理想)을 위해 조직적으로 이뤄진 평화적(平和的) 항쟁으로서는 세계 역사상 최대 실례(實例)”란 평(評)을, LosAngeles Times는 1919년 4월 6일자 ‘생명의 존엄성’이란 제하(題下) 논설에서 “3·1선언은 美國 독립선언과 함께 인류의 금자탑을 쌓은 영원불멸의 의의(意義)를 갖는다”고 했다. 이는 성경에서의 말씀 그대로 ‘광야(曠野)서 외치는 선지자의 부르짖음’이다. 하나님이시여, 광란(狂亂)의 세계로 하여금 잠시 가던 길 멈추게 하시고 이 부르짖는 소리에 귀 기울이시라.

 

"광주전남 지역민의 소중한 제보를 기다립니다"  기사제보
저작권자 © 남도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