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호도회소 농민군 군수물자 확보 위해 낙안읍성 공격

<101. 순천의 동학농민혁명>
영호도회소 농민군 군수물자 확보 위해 낙안읍성 공격
낙안읍성·보성농민군 징발 피하려 김인배 농민군에 대항
양측 농민군 전투로 낙안읍성 민가 150여 채 불에 타기도
관군들 동학란 진압 후 순천성에서만 400여 농민군 처형
 

순천 낙안읍성
1894년 음력 9월 15일~19일에 영호도회소의 양하일이 이끄는 농민군이 군수품을 확보하기 위해 이곳을 점령했다./순천시 제공

■ 낙안읍성 공격과 군수물자 확보

김인배가 이끄는 영호도회소와 주력부대가 1895년 음력 9월 1일 경남지역으로 진출했다. 영호도회소의 본부인 순천에는 그럼에도 상당한 규모의 농민군이 포진하고 있었다. 이들은 주력부대의 후방을 방어함과 동시에 치안의 유지와 폐정개혁을 지속적으로 수행했다. 또한 농민군의 보급로와 군수품을 확보하는 중대한 임무를 맡았다.

수만 명의 농민군을 지원하기 위해서는 군수물자의 확보가 가장 절박하고 어려운 문제였다. 영호도회소 김인배 농민군 지도부는 군량과 옷, 신발 등을 각 지역별로 할당해 징발했다. 부호들로부터 반강제적으로 얻어내기도 했다.

순천과 인접한 낙안군의 경우에는 영호도회소의 영향력이 별로 미치지 않았다. 이유는 낙안 군수가 향리와 주민들을 결속시켜 농민군에게 비협조적인 태도를 취했기 때문이었다. 영호도회소의 농민군은 양하일(梁河一)을 중심으로 1천여명을 모아 낙안읍성을 공격했다.

양하일은 순천지방의 토호로서 원래 순천에서 군수물자를 징발하려 했으나 부친이 결사적으로 반대했다. 이에 영호도회소에 비협조적인 낙안을 공격대상으로 삼았다. 음력 9월 15일 양하일은 낙안읍성으로 가는 길목인 선암사에 1천여명의 농민군 연합부대를 집결시켰다.

농민군은 어둠이 깔리자 선암사를 출발해 낙안으로 향했다. 이들은 오금재를 넘어 낙안에 이르러 야간에 기습공격을 단행했다. 농민군은 비교적 손쉽게 낙안읍성을 함락시켰다. 낙안군수 장교준(張敎駿)등의 수성군 측은 이른바 의소(義所)를 만들어 다음날 다시 낙안읍성을 되찾으려 했으나 농민군의 방어가 견고해 실패했다. 영호도회소의 농민군은 군수품을 확보한 다음 선암사로 유유히 퇴각했다.

낙안읍성 공격에는 매우 다양한 농민군 부대가 참여했다. 영호도회소는 순천, 고산, 남원, 태인, 금구 등 전북과 전남 지역의 농민군이 연합한 형태였다. 한편 낙안의 농민군은 영호도회소의 낙안읍성 공격에 저항했다. 낙안군 집강 김사일(金士逸)은 보성의 농민군과 연합해 방어했으나 패배했다.

다시 말해 농민군 측의 경우에도 이해가 엇갈려 서로 전투를 벌였다. 낙안의 농민군들은 집강 김사일을 중심으로 자신들의 세력 근거지인 낙안을 지키려고 노력했다. 여기에 낙안의 지척에 있는 보성의 농민군들도 불똥이 튈 것을 우려해 낙안의 농민군을 도와준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들은 1천여명의 영호도회소 농민군을 당해내지 못했다. 오히려 농민군의 입장을 헤아려주지 않아 더욱 가혹하게 징발 당했다. 낙안을 점령한 양하일의 농민군은 향교에 들어가 창고의 문을 부수고 서책(書冊)과 기물을 접수했다. 그리고 적대적인 태도를 보인 향교의 교임 9명을 구타했다.

이들은 이교청의 문서를 소각했고 저항한 민가 149호를 불태웠다. 소 55마리와 의복, 기물 등을 빼앗아 소에 실어갔다. 막대한 군수물자를 확보한 농민군은 영호도회소로 돌아갔다. 영남 진출을 위한 군수품을 확보한 것이었다.

■ 영호도회소의 붕괴와 피해

1894년 음력 7월 3일 여수에 있던 좌수영 군대의 좌수사로 김철규가 부임했다. 그는 부임하자마자 농민군 토벌을 위해 전라좌수영의 전력을 대폭 증강하고 토벌 준비를 갖춰 나갔다. 이러한 좌수영의 움직임은 인근지역의 농민군뿐만 아니라 순천 영호도회소에 매우 위협적이었다.

음력 9월 순천농민군과 쌍봉 선소마을의 윤경삼이 이끄는 현지 농민군이 합세해 좌수영을 습격했다. 농민군은 남문(현재 여수시 중앙동 로터리)에 이르러 대포를 쐈고 좌수사 김철규는 진남관에서 농민군 34명을 잡아 목을 벤 다음 바다에 던졌다.

그 후 농민군 수만여 명은 음력 11월 10일과 20일 좌수영 군대를 공격했으나 실패하고 순천으로 후퇴했다. 상황이 조정에 유리한 방향으로 바뀌자 농민군을 배반하는 자가 속출하기 시작했다. 순천의 향리와 군교, 일부 주민들은 영호도회소의 본영을 습격해 순천 쌍암출신의 영호도집강 정우형 등 수백 명을 일망타진했다. 그중 94명은 몽둥이에 맞아 죽었다.

순천성안에는 수성군(守城軍)에 의해 죽임을 당한 농민군의 시체가 400여구나 버려져 있었다고 전해진다. 당시 총살되거나 효수된 영호도회소의 농민군은 도집강 이하 성찰, 접주, 서기, 접사, 농민군 등 다양한 직책을 맡고 있던 자들이었다. 농민군은 음력 12월 10일 좌수영 군대가 순천에 온 이후에 주로 좌수영에 옮겨진 후 희생됐다. 순천부 좌수와 공형 역시 좌수영에 압송돼 억울하게 포살된 경우도 있었다.

순천부의 영장 이풍희는 농민군 진압에 가장 앞장섰다. 그는 집강소 시기에 순천에 부임했다. 당시 영호도회소의 농민군이 순천을 장악하고 있었다. 그 역시 순천부사 이수홍과 마찬가지로 곤욕을 당했다. 그 후 좌수영으로 도망갔다가 좌수영의 선봉이 돼 순천으로 돌아와 보복 차원에서 그의 분함을 설욕하려 했다.

수성군과 관군 및 일본군들이 영호도회소의 농민군을 진압하면서 순천 부민들로부터 거두어들인 군용전과 군수물자도 막대했다. 순천에서 모집한 포군의 군용전이 약 2천85량이나 됐다. 그리고 1894년 음력 12월 이후 진압군들에게 바친 금액이 총 4천943량, 백목(白木) 200필이었다. 낙안에서도 진압군의 경비로 3천449량이나 지출됐다. 이러한 경비는 대부분 좌수영군이나 운선봉군 및 일본군의 식사비로 사용됐다.

순천 인근의 낙안에서도 농민군에 대한 진압은 계속됐다. 음력 12월 초순 낙안군에서도 아전과 일부 주민을 중심으로 민포를 결성해 농민군이나 그 관련자를 체포했다. 음력 12월 25일 낙안군 동면 출신인 이수희(李守禧)가 체포됐다. 이수희는 고흥출신의 유복만(柳福萬) 세력이었는데 김인배를 따라 좌수영 공격시 중군(中軍)으로 참여했다. 그는 25일 밤에 붙잡혀 다음날 아침 처형됐다.

영호도회소의 지도부와 농민군들은 일본군과 관군의 막강한 화력과 수성군의 잔혹한 진압작전으로 엄청난 피해를 입고 비참한 결말을 맞았다.
 

선암사(조선고적도보)
동학농민군은 1894년 음력 9월 15일 낙안읍성을 공격하기 위해 전남 순천시 승주읍에 위치한 선암사에 집결했다. 양하일은 농민군 1천여명을 거느리고 순천을 출발해 중간 지점인 선암사에 주둔했다.
낙안향교
전남 순천시 낙안면 교촌리에 위치한 낙안향교. 낙안을 점령한 양하일과 농민군은 향교의 서책(書冊)과 기물을 빼앗고 농민군에 적대적이었던 향교의 교임 9명을 구타했다.

/최혁 기자 kjhyuckchoi@hanmail.net

/정유진 기자 jin1@namdo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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