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농민군 전라좌수영 수차례 공격했으나 실패

<102. 여수의 동학농민혁명>
동학농민군 전라좌수영 수차례 공격했으나 실패
김철규 전라좌수사 군대·백성 결속시켜 농민군 강경 탄압
김인배 주력부대 경상지역 전투 지원하느라 전력 약해져
종고산 점령하고 좌수영 공격하려 했으나 맹추위에 후퇴
 

순천고돌산지도(順天古突山鎭地圖, 1872년 지방지도)
고돌산진은 지금의 전남 여수시 화양면 용주리 일대이다. 전라도와 경상도를 잇는 뱃길의 길목에 위치한 곳으로 원래 수군만호를 두었는데 중종 때 만호를 혁파해 권관을 두고, 1522년에 다시 소모별장을 두었다./서울대학교 규장각

여수 지역 동학농민군의 활동은 순천의 영호도회소와 긴밀한 관련이 있었다. 여수 전라좌수영(全羅左水營)은 갑오혁명 초기에는 동학도에게 그리 적대적이지 않았다. 당시 전라좌수사였던 이봉호(李鳳鎬)는 동학교인에 대해 호의적이었다. 그의 부하 중에서도 상당수가 동학에 입문하기도 했다. 이런 이유로 이봉호는 면직되고 말았다.

후임으로 1894년 음력 7월 초 김철규(金徹圭)가 전라좌수사로 부임했다. 김철규는 부임하는 도중 농민군에게 봉변을 당했는데 이런 소식이 전봉준에게 알려졌다. 전봉준은 김철규에게 곧바로 통행증을 발급해주고 집강소 성찰 4명에게 호위토록 해 그가 여수에 무사히 도착할 수 있게 도왔다.

그러나 김철규는 부임하자마자 농민군의 활동에 적대적인 입장을 보였다. 그는 군교들과 함께 전라좌수영의 전력을 대폭 증강해 동학농민군을 토벌할 준비를 갖춰 나갔다. 김철규는 전라좌수영 안의 군인들과 주민들을 결속시켜 농민군을 체포하고 탄압했다.

이후 전라좌수영의 동학농민군 세력은 급격히 감소했다. 그는 일본군 수백 명을 끌어들여 전라좌수영 밖에 주둔시켜 주민들의 동요를 차단했다. 그러자 동학농민군은 전라좌수사 김철규를 응징하고 농민군 탄압근거지를 없애기 위해 좌수영을 공격했다.

■ 여수 동학농민혁명 경과

순천대 홍영기 교수의 연구에 따르면 영호도회소의 좌수영 공격은 1894년 음력 9월경에 시작됐다. 여수 쌍봉면 출신의 박군하와 윤경삼(尹京三)이 영호도회소의 동학농민군과 더불어 전라좌수영 남문을 공격했다. 보급로와 후방 기지를 확보하기 위한 것이었으나 전라좌수영의 철저한 방비로 공격은 실패했다. 붙잡힌 농민군 3~4명은 바다에 내던져졌다.

이후 영호도회소는 전라좌수영에 대한 공격을 자제할 수밖에 없었다. 영호도회소의 주력 부대가 경상남도 서부 지역으로 진출한 상황에서 전라좌수영을 섣불리 공격하다가는 동학농민군의 희생이 많아질 뿐이었다. 또한 경남 서부지역으로 진출한 농민군의 보급과 군수물자를 책임져야 했기에 전라좌수영을 공략할 여력이 없었다.

한편 경상도 서부 지역으로 진출을 시도했던 영호도회소 김인배 주력 부대는 조일(朝日)연합 부대와 몇 차례 싸웠으나 모두 패했다. 농민군은 수만 많았지 싸움에 능한 일본군과 관군의 적수가 되질 못했다. 신식무기로 무장한 일본군에 맞서 화승총이나 죽창을 들고 싸운 농민군은 패할 수밖에 없었다.

김인배는 경상도 서부 지역에 거점을 확보한 뒤 부산까지 진격해 일본 세력을 완전히 쫓아낼 계획이었다. 그러나 이 계획은 결국 실패로 돌아갔다. 일본군과 관군은 우금치와 청주에서 전봉준과 김개남의 농민군을 대파하고 파죽지세로 전라도를 향해 남진했다.

관군의 선봉장 이규태(李圭泰)는 농민군의 무력 진압을 서둘렀다. 그는 일본군을 3개 부대로 나눠 전라도로 보냈다. 1개 부대는 충청도 서해안지대를 우회, 전라도 서남해안을 거쳐 여수로 향했다. 다른 1개 부대는 서울에서 충청도 중앙부를 지나 전라도 남단에 이르렀다. 나머지 1개 부대는 서울에서 강원도와 충청도를 거쳐 전라도로 남하했다.

일본군 3개 부대의 최종 목적지는 모두 전라도였다. 농민군을 전라도의 서남부인 강진, 해남방면으로 몰아붙이기 위한 작전이었다. 농민군을 한구석으로 포위해 섬멸하려는 ‘토끼몰이 작전’이었다. 전라도에 출동한 일본군은 각 부대마다 조선의 관군을 앞세웠다. 일본은 동학농민군 진압을 위해 창설한 후비보병 독립 제19대대를 11월 12일 남하시켰다.

일본군과 관군이 사방에서 포위망을 조여오자 김인배는 12월 초순 전라좌도 지역에서 활동 중인 여러 접주들과 협의해 전라좌수영을 점령하기로 했다. 그는 여수반도의 남단에 위치한 전라좌수영을 확보해 지구전을 벌이고 여의치 않으면 바다를 통해 남해의 수많은 섬으로 들어갈 작정이었다.

영호도회소의 대접주 김인배는 음력 11월 10일 수만 명을 이끌고 전라좌수영으로 향했다. 그는 하동에서의 패배를 설욕하기 위해 좌수영을 점령하려고 했다. 순천 영호도회소를 중심으로 한 동학농민군은 전라좌수영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동학농민군 4만여 명은 현재 여수시 소라면에 위치한 덕양역(德陽驛)에서 전라좌수영의 정찰병을 물리친 뒤 좌수영으로 향했다.

덕양역은 여수와 순천의 중간 지점에 위치하고 있는 교통의 중심지였다. 때문에 영호도회소는 덕양역을 좌수영 공격의 중간 기지로 활용했다. 농민군은 전라좌수영의 뒷산인 종고산(鍾鼓山)을 점령하고 전라좌수영성을 공격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그러나 좌수사 김철규는 좌수영군을 동원해 철저히 방어했다.

농민군은 쉽게 좌수영을 공격할 수 없었다. 더욱이 강추위가 몰아닥치면서 종고산 위에 주둔한 농민군들은 바닷바람을 견디기 힘들었다. 먹을거리마저 꽁꽁 얼어붙어 씹을 수조차 없어 끼니를 때우기도 힘들었다. 농민군들은 3일간 머물다가 일단 순천으로 철수했다.
 

진남관과 종고산의 과거모습
1899년 촬영된 여수구항과 뒤쪽 큰 건물이 진남관이다./여수시청 제공
진남관과 종고산 현재모습
진남관은 전라남도 여수시 군자동에 있는 조선시대의 객사 건물로 전라좌수영에 속했던 건물이다.

/최혁 기자 kjhyuckchoi@hanmail.net

/정유진 기자 jin1@namdo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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