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 여수의 동학농민혁명>
수세몰린 전라좌수영군 일본군 도움 받아 농민군 격퇴

농민군과 전라좌수영군, 덕양역과 종고산 일대에서 공방 벌여
좌수영 함락위해 농민군 火攻작전…민가 500여 채 불타기도
전라좌수사 김철규 요청에 일본군 200명과 일본어부 전투가세
 

1910년대 예암산에서 바라본 여수 시가지 모습/여수시청 제공

1894년 음력 11월 16일 전열을 정비한 김인배는 낙안 출신 이수희(李守喜)를 중군장으로 삼아 다시 전라좌수영 공격에 나섰다. 쌍봉면 출신 박군하(朴君河), 윤경삼(尹京三)과 돌산읍 출신 황종래(黃鐘來) 등이 전라좌수영 공격을 이끌었다. 하지만 전라좌수영은 농민군에 대비해 더욱 견고하게 성을 지키고 있었다. 이에 맞서 농민군은 야간 공격까지 했지만 60여명의 사상자를 남긴 채 다시 덕양역으로 후퇴했다.

전라좌수영의 영장(營將) 이주회(李周會)가 이끄는 좌수영군은 음력 11월 20일 덕양역에 주둔하고 있던 농민군을 기습했다. 그러나 좌수영군의 공격을 대비하고 있던 농민군에게 역습을 당해 좌수영까지 추격당했다. 좌수영군사들은 여수에서 30리 정도 떨어진 덕양역까지 오느라 지쳐 있었다. 날씨도 몹시 추워 싸우기가 힘들었다. 힘을 얻은 농민군은 흩어지는 관군을 전라좌수영까지 추격했다.

전라좌수영에 도착한 동학농민군은 여세를 몰아 전라좌수영을 함락시키려 했다. 동학군 지도부는 좌수영 서문 밖에 싸움에 능한 농민들을 정예의 병사를 배치하고 종고산에서 지구전을 계획했다. 전라좌수영을 포위한 동학농민군과 성내에 고립된 관군 사이에 치열한 공방전이 계속됐다. 농민군은 병력을 나눠 농민군을 좌수영 서문 밖에 주둔시켰다.

좌수영이 함락되지 않자 농민군은 바람을 이용해 성 주변의 민가에 불을 질렀다. 민가 500여 채가 불에 탔으나 성벽이 높아 불길이 성안으로 번지지 않았다. 좌수영을 함락시키지는 못했지만 좌수영은 고립되며 상황은 점점 불리해졌다.

전라좌수사 김철규는 음력 11월 25일 여수 앞바다에 정박해 있던 일본 해군 쓰쿠바(筑波號) 군함에 비밀 서찰을 보내 도움을 요청했다. 다음날 일본군 함장 흑강대도(黑岡帶刀)는 지금의 해병대라 할 수 있는 육전대(陸戰隊) 100여 명을 상륙시켜 좌수영 군대와 합류해 농민군 진압에 나섰다. 일본군은 육전대를 200명으로 늘리고 금오도(金鰲島)와 나팔도(喇叭島)의 일본 어민들까지 강제로 좌수영 공방전에 가담시켰다. 일본 육전대와 좌수영 초관(哨官) 곽경환(郭景煥)은 덕양역으로 돌아가는 농민군을 역습했다.

종고산과 서문에 주둔한 농민군도 목숨을 걸고 좌수영을 공격했다. 하지만 전력을 보강한 일본군과 좌수영군, 성 안의 주민들은 결사 항전을 벌여 농민군을 막았다. 일본군과 좌수영군은 군사를 매복시켜 농민군을 기습했다. 좌수영군은 일본군을 두려워하는 농민군의 심리를 이용해 일본군복으로 변장시킨 군대를 투입했는데 그 효과는 상당했다.

영호도회소의 대접주 김인배가 직접 나서서 3~4회에 걸쳐 좌수영을 공격했으나 끝내 점령하지 못했다. 영호도회소의 최종목표는 실패로 돌아갔다. 좌수영을 근거지삼아 지구전을 펼치고 여의치 않을 경우 남해의 섬으로 들어가 장기항전을 모색하려는 농민군의 마지막 기대가 무너졌다.

11월 중순을 고비로 각 지역에서 활동 중인 농민군의 전세가 기울기 시작했다. 결국 농민군은 수많은 희생자를 남긴 채 순천으로 철수했다. 이후에도 농민군은 1895년 1월까지 여러 차례 좌수영군과 소규모의 전투를 벌였으나 전세를 역전시킬 기회를 잡지 못했다.

그러자 집강소 활동기 부터 농민군에 협조해온 하급관리와 주민들의 분위기가 단번에 달라졌다. 영호도회소의 경남 진출이 좌절되고 마지막 거점이자 유일한 희망이었던 좌수영 공격이 실패로 돌아가자 그들은 태도를 돌변해 농민군을 적대적으로 대했다. 농민군 중에서 도망자가 속출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영호도회소의 농민군을 몰아내려는 움직임이 빠르게 확산됐다.

일본군과 관군은 처음부터 강진과 해남지역으로 농민군을 몰아붙여 완전히 괴멸시키려고 포위 전략을 계획했다. 영호도회소의 농민군 역시 그 포위망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영호도회소는 좌수영 공격에 실패한 직후인 12월 하순부터 급격히 쇠퇴했다. 좌수영군과 함께 일본군이 합동작전을 펼치자 결국 영호도회소는 좌수영을 점령하지 못한 채 순천으로 퇴각했다.
 

진남관에서 내려다본 여수시가지와 돌산대교/위직량 기자 jrwie@hanmail.net
좌수영의 객사였던 진남관

/최혁 기자 kjhyuckchoi@hanmail.net

/정유진 기자 jin1@namdo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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