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양 곡화목장 노비들 상당수가 동학농민군에 가담

<105. 여수의 동학농민혁명>
화양 곡화목장 노비들 상당수가 동학농민군에 가담
목장에 남아있던 노비들은 농민군 토벌군으로 동원되기도
기회 엿보던 이주회 일본군 앞잡이 돼 40여명 농민군 참살
순천대 홍영기교수·여수지역사회연구소 동학사 정리에 공헌

 

여수면사무소. 1897년 촬영된 사진으로 ‘여수군여수면사무소’라는 현판이 우측에 걸려있다. 우측에 앉아 있는 콧수염을 기른 사람이 면장으로 보인다./여수시청 제공

동학농민혁명 당시 지금의 여수시 화양면 일대 목장(牧場:말을 키우던 곳)에서 일하던 관군과 노비들이 농민군을 진압하는 군사로 동원됐다는 사실은 지난 회에 밝힌 바 있다. 화양면 화동리(華東里) 고인돌에는 조선조 곡화목장 감목관들의 치적을 기리는 글들이 새겨져 있다. 화양고등학교 정문앞에 놓여 있는 고인돌에는 ‘빙옥기정(氷玉其政)’이라는 글귀가 있다.

이 말은 ‘빙옥같이 투명하게 다스렸다’는 뜻이나 감목관들이 실제로 투명하고 너그럽게 일하는 이들을 다스렸는지는 의구심이 든다. 화양지역은 조선시대 말까지 곡화목장에 속해 있었다. 기록에 따르면 말을 키우던 목자들은 감목관의 폭정아래 매우 힘들게 살았다. 그래서 종이라는 신분으로 목장에서 일하던 노비 상당수는 동학에 입교한 뒤 농민군으로 나섰다.

농민군에 가담하지 않았던 노비들은 감목관의 지시와 명령으로 동학농민군을 진압하는 토벌군으로 동원됐던 것이다. 사복시는 말을 키우고 관리하는 관청이었다. 화양목장 역시 사복시 소속 목장이었다. 목장의 노비들은 말을 먹이고 돌보느라 매우 힘들게 생활했다. 이런 가운데 모두가 평등하고 귀천이 없다는 동학사상은 노비들을 매우 솔깃하게 만들었다.

화동리 마을 북쪽에는 안양산이 자리 잡고 있다. 산 아래 안양동이라는 작은 마을이 있어서 얻은 이름이다. 옛 곡화목장의 기록에는 화산으로 기록됐다. 안양산은 화양면의 중심에 있는 산으로 1897년 화양면의 이름이 생길 때 화산의 남쪽이라는 화양의 이름이 생겼다. 안양산에서는 동학군과 관군들 사이에서 크고 작은 전투가 벌어졌다.

동학군의 좌수영전투에 관해 기록된 오하기문에는 3만여 명의 동학군이 좌수영성을 공격하고 실패한 과정이 기록돼 있다. 김인배의 주도아래 운영되던 순천 영호도회소 소속 동학군 주력은 패하면서 순천지역으로 빠져나갔다. 그렇지만 여수주변 동학군들은 화양반도지역으로 내몰리면서 화양 장수리의 동성바위 주변에서 모두 처참한 죽음을 맞았다.

■ 율촌 전투지

순천, 여수, 광양 일대에서 가장 큰 농민군 세력을 거느리고 있던 영호대접주 김인배와 수접주 유하덕은 음력 12월 6일 새벽, 순천의 민포군에 의해 처형됐다. 하지만 이 일대에는 여전히 많은 농민군이 곳곳에서 진을 치고 있었다. 좌수영에서는 12월 7일 중초영장 곽경환에게 100여명의 관군을 주고 광양으로 출전하도록 했다. 다음날에는 영관 이주회(이풍영과 동일인으로 훗날 을미사변 당시 왕비 시해범)에게 500명을 주고 순천방향의 농민군을 진압하도록 했다.

이주회는 12월 8일 좌수영을 출발해 오전 8시경 순천 사항리의 산 위에서 농민군과 접전을 벌였다. 10리를 쫓아가서 농민군을 체포해 접사1명을 참수하고 나머지 40명의 농민군을 포살했다. 농민군들은 창에 찔려 죽거나 목이 베어 숨졌다. 이때 좌수영군이 농민군을 처형한 곳은 ‘모래목’이라고 부르는 지역이다.

사항마을에는 좌우에 낮은 산이 있고 작은 시내인 율촌천에 가로놓인 동교라 부르는 작은 나무다리가 있었다. 이주회에게 처형된 농민군의 피가 이 일대의 하얀 모래밭을 붉게 물들였다고 전해진다. 이후로도 이주회는 11일 순천성에서 접주1명을 사로잡아 참수했고 12일에도 접주3명, 성찰1명을 참수했다. 13일에는 집강1명과 접주2명, 성찰1명을 포살했다.

이주회는 1843년 경기도 광주 산성리에서 태어났다. 무과를 거쳐 오위장에 올랐고 병인양요(1866) 때 공로를 세워 대원군의 눈에 들어 그의 심복으로 활약했다. 현감을 거쳐 외무위원까지 올랐으며 이때 김옥균, 우범선 등과 친교를 맺었다. 갑신정변이 일어나자 이주회는 김옥균과의 친교로 화를 입을까 두려워 일본으로 도망쳤다.

3년 만에 사면을 받고 귀국한 그는 자원하여 금오도 도사로 내려갔지만 유배나 다름없는 생활이었다. 형 이제영과 가족들을 데리고 가서 개간사업을 벌였는데 이 개간사업에 가렴주구를 피해 들어온 순천 지방의 농어민들을 동원했다. 1892년 가을 일본 우익 낭인인 다케다 한시가 조선에 침략의 거점을 마련하고 사업자금을 확보하기 위해 금오도로 이주회를 찾아왔다. 어선 8척과 일본인 어부 30명을 고용해 대대적인 고기잡이 사업을 벌였지만 이듬해에 파산했다.

1894년 가을 동학농민군 토벌을 위해 일본 군함 쓰쿠바함이 순천에 들어오자 이주회는 스스로 군함에 들어가 지형을 설명하고 작전 계획을 세우는데 참여하는 등 일본군의 앞잡이가 돼 공을 세웠다. 이때의 공로로 일본군의 도움을 받아 이주회는 김홍집 친일내각의 군부협판에 파격적으로 발탁됐다. 그러나 1895년 삼국간섭으로 일본 세력이 쇠퇴하고 민씨 세력이 권력의 전면에 등장하자 그는 자리에서 쫓겨났다.

이때 새로 부임한 미우라 일본공사와 일본 낭인배들에 의한 ‘민비 제거’ 계획에 이주회는 조선 측 주범으로 가담했다. 그의 역할은 대원군을 이 사건에 관련시키고 우범선, 구연수 등을 끌어들이는 것이었다. 그는 이 사건으로 체포된 뒤 대역 죄인으로 1895년 12월 19일 처형당했다.

영호도회소와 여수 지역 동학농민군의 활동상과 희생은 널리 알려져 있지 않다. 최근 들어 순천대 홍영기 교수와 여수지역사회연구소 회원들의 현지조사 등으로 그들의 행적이 조금씩 밝혀지고 있다. 여수지역 농민들은 부패한 관리와 이 땅을 집어삼키려는 일제의 침략에 맞서 용감하게, 당당하게 맞서 싸웠다. 비록 그들은 싸움에 처참한 죽음을 맞았으나 그들의 의로운 정신과 기개는 후손들에게 진정한 애국의 길이 무엇인지를 웅변하고 있다.
 

1906년 11월 목포우편소 여수임시우편사무취급소 모습. 직원들이 단체 촬영 한 것으로 보인다.
동학농민군이 집단 처형된 장소. 화양일대에서 조선관군에 맞서 싸우던 동학농민군들은 지금의 여천농협 화양지점 앞 일대 공터에서 살해돼 불에 태워진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최혁 기자 kjhyuckchoi@hanmail.net

/정유진 기자 jin1@namdo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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