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는 18일 광주 북구 운정동 국립5·18민주묘지에서 제37주년 5·18민주화운동 정부 기념식이 열린다. 사진은 1980년 5월 전남대학교 정문 앞에서 민족민주화성회를 위해 시가 행진을 하기 앞서 대학생들이 경찰과 대치하고 있는 모습.

 5·18민주화운동의 도화선이 된 1980년 5월18일 일요일 아침은 쌀쌀했으나 낮에는 포근한, 화창한 봄 날씨였다.

그러나 광주 시내 분위기는 을씨년스러웠다. 거리마다 침묵과 긴장이 감돌았다.

전남대 정문 앞은 완전무장한 7공수여단 33대대가 출입을 통제하고 있었다. 이들은 휴교령이 내린 사실을 알리며 학생들에게 귀가를 종용했다. 오전 7시께 도서관에 가기 위해 정문을 들어가려던 학생들이 공수대원에게 구타를 당하기도 했다.

학생들은 쉽게 돌아서지 않았고 오전 10시가 넘어서자 100여명의 학생들이 정문 앞 다리에서 농성을 시작했다. 어느덧 학생들은 200~300명까지 불어났고 '계엄 해제', '전두환 물러가라', '휴교령 철회'를 외쳤다.

"돌격 앞으로", 그들을 향해 공수대원들이 달려들어 곤봉으로 맨손의 학생들을 마구 후려쳤다. 실신한 학생들은 질질 끌고 갔다.

공수대원과 밀고 밀리기를 수차례 반복한 학생들은 광주역 광장에서 재집결해 대오를 정비한 뒤 금남로 전남도청 앞 광장을 목표로 시외버스 공용터미널을 거쳐 가톨릭센터 앞까지 진출했다. '비상계엄 해제', '김대중 석방', '휴교령 철회', 전두환·계엄군 물러가라' 구호를 목청껏 외쳤다.

이때 학생 시위를 통해 '김대중 체포와 전두환 쿠데타' 소식을 접한 광주 시민들은 충격 속에서 동요하기 시작했다.

오후 4시께 7공수는 전남도청 방향으로 전진하면서 금남로와 가톨릭센터, 충장로 등을 중심으로 강력한 시위진압을 실시했다. 시위 가담 여부와 상관없이 젊은 사람이면 남녀를 불문하고 무조건 쫓아가 곤봉으로 후려쳤다. 대검 사용도 망설이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반항하는 기색이 보이면 여럿이 몰려들어 무차별로 때리고 짓밟았다. 쓰러진 사람들은 질질 끌고 가 트럭에 실었다. 공수부대는 마치 '살인면허'를 받은 것처럼 잔인했다.

공수부대의 유혈극은 금남로 등 시내 중심에 국한되지 않았다. 광주 곳곳을 누비면서 민가까지 들어가 젊은 남자들을 보이는 대로 끌어내 무자비하게 폭행한 뒤 옷을 벗기고 포박해 연행했다. 시민들은 공수부대의 야만적인 폭력에 경악하고 분노했지만 겁에 질려 항의할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 오는 18일 광주 북구 운정동 국립5·18민주묘지에서 제37주년 5·18민주화운동 정부 기념식이 열린다. 사진은 1980년 5월 광주 금남로 일원을 장악한 공수부대 병력.

오후 7시께 계림동 광주고 부근에 수백 명의 청년과 학생들이 공수부대에 맞섰지만 역부족이었다. 오후 8시15분께 금남로 가톨릭센터 앞에서는 학생과 시민 600여명이 공수부대와 투석전을 벌였지만 10분 만에 해산 당했다.

밤늦게까지 산발적인 시위가 이어졌고 곳곳에서 비명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밤 11시가 돼서야 시위가 겨우 잦아들었다.

최초 희생자가 나왔다. 5·18 첫 희생자는 청각장애로 말을 하지 못하던 김경철(당시 24세)씨였다. 백운동 까치고개 부근에 상점을 두고 광주 시내 다방과 가게를 돌아다니며 구두를 닦거나 신발을 만들어 팔았던 그는 18일 오후, 평소처럼 일감을 찾아 다녔다.

충장로 제일극장 골목 입구까지 온 김씨는 갑자기 나타난 3~4명의 공수부대원에게 진압봉으로 머리를 맞아 피를 흘리고 쓰러졌다. 적십자병원을 거쳐 국군통합병원으로 옮겨진 그는 다음날 새벽 3시 사망 판정을 받았다.

'피의 일요일', 공수부대의 만행에 대한 흉흉한 소문은 광주 전역에 들불처럼 번져갔다. 시민들은 공포와 분노를 억누르며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

18일 하루 동안 연행자가 대학생 114명, 전문대생 35명, 고교생 6명, 재수생 66명, 일반 시민 184명 등 모두 405명이었다. 이 중 68명이 두부 외상, 타박상, 자상 등을 입었고 12명은 중태라고 기록돼 있다. 그러나 실제 연행자와 부상자는 그보다 훨씬 많았다.

신군부는 이날 통금시간을 오후 9시로 당기고 11공수여단을 추가로 광주에 투입했다.

그날 저녁 TV와 라디오 뉴스는 광주에 대한 단 한 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 엄청난 사태가 벌어졌지만 언론은 철저히 광주를 외면했다. 18일은 일요일이라 신문도 나오지 않는 날이었다. 광주는 어둠 속에서 '공포의 도가니'로 변해갔다.

 

/뉴시스

 

 

"광주전남 지역민의 소중한 제보를 기다립니다"  기사제보
저작권자 © 남도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