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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도 동학유적지-<107. 광양의 동학농민혁명>순천 농민군, 혈전 끝에 하동 장악 후 진주공격

<107. 광양의 동학농민혁명>



순천 농민군, 혈전 끝에 하동 장악 후 진주공격



1만여 김인배 농민군 하동농민군과 합세해 하동부 공격

하동 민포군 대포 쏘며 저항했으나 농민군에 밀려 후퇴

농민군 가족 살해 보복하고 민포군 집 500여 채 불 질러
 

광양관아 터(현재 광양문화원)
광양문화원과 일대 상점들. 조선시대 광양의 관아가 자리했던 곳에는 지금 광양문화원과 상점들이 들어서 있다./위직량 기자 jrwie@hanmail.net
광양문화원 앞(예전에는 관아 건물이 있었다.)
광양문화원 앞. 예전에는 이곳에 관아 건물이 있었다. 동학농민군들은 한때 광양관아를 접수하고 폐정개혁을 추진했다.

김김개남의 영향 하에 있던 순천의 영호도회소는 1894년 음력 8월 말부터 새로운 활동에 들어갔다. 동학의 포교, 치안 유지 및 폐정개혁 등을 병행하면서 본격적인 무력투쟁을 시작했다. 영호도회소는 먼저 경남 서부지역을 점령하기로 했다. 이들은 경남 서부지역을 장악하면 전라도 지역에 대한 관군과 일본군의 공격을 미리 차단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1894년 음력 9월 1일 영호도회소의 대접주 김인배와 수접주 유하덕은 1만여 명의 농민군을 이끌고 하동으로 쳐들어가기 위해 섬진나루에 진을 쳤다. 섬진강을 사이에 두고 광양에 집결한 영호도회소의 농민군은 하동의 관군을 비롯한 민포군과 대치했다. 그러나 하동 지역의 방어는 생각보다 훨씬 견고했다.

김인배는 부적을 이용해 농민군들에게 다치지 않고 승리할 수 있다는 믿음을 심어주었다. 사기가 오른 농민군은 용감하게 싸웠다. 마침내 농민군은 섬진강을 건널 수 있었다. 농민군은 두 부대로 나뉘어 한 부대는 얕은 여울을 건너 하동부의 북쪽에 진을 쳤다. 다른 한 부대는 광양의 망덕 나루터에서 배다리를 만들어 하동부의 남쪽에 진을 쳤다.

당시 하동부는 화개의 민포군이 지키고 있었다. 하동부사 이채연은 농민군이 몰려온다는 소식을 듣고 이미 대구로 달아난 상태였다. 하동 민포군은 전 왕부(王簿) 김진옥(金振玉)을 민포대장으로 삼고 통영의 대완포(大碗砲) 12문으로 무장한 채 죽음을 무릅쓰고 지키려고 했다. 이들은 안봉(鞍峰, 하동 관아의 뒷산)에 진을 치고서 농민군과 싸울 준비를 했다.

음력 9월 2일 초저녁 영호도회소 농민군은 하동의 동학농민군 여장협이 이끄는 1천여 명과 합세해 안봉을 향해 포위망을 좁혀갔다. 수천 명을 동원한 하동의 민포군은 사방에서 협공해 오는 농민군에게 대포를 쐈으나 대부분 빗나갔다. 게다가 어두워지자 총을 쏘기도 어려워졌다. 열세에 놓인 민포군들은 포위망을 뚫고 달아났다.

음력 9월 3일 날이 밝자 농민군은 하동부에 들어가 하동부사 이채연의 집과 민포군과 관련된 민가 10여 채에 불을 질렀다. 농민군은 하동부에 도소를 설치하고 읍권을 장악했다. 지난 7월 민포군에게 쫓겨난 하동의 장사꾼을 중심으로 한 일부 농민군은 곧바로 민포군의 거점인 화개로 가 500여 채의 민포군의 집에 불을 질렀다. 민포군이 자신들의 처자를 죽이고 집을 태운 것에 대한 보복이었다.

그리고 미처 도망가지 못한 민포군 10여 명을 처형했다. 또한 군량으로 이용하기 위해 민포군의 재산을 빼앗아 화개에서 광양, 순천으로 운반했다. 하동 지역을 장악한 농민군의 주력부대는 이곳에 5일 정도 머물며 군기를 정돈한 후 일부는 광양과 순천으로 되돌아갔다. 나머지는 김인배의 통솔 하에 진주를 향해 진격했다. 음력 9월 15일 광양과 순천의 동학농민군 수천 명은 곤양을 거쳐 거침없이 진주로 향했다.

하동 다솔사(多率寺)에 모인 하동 동학군 수천 명은 진주 접경의 완사역(完沙驛)에서 순천 농민군과 합세했다. 농민군의 세력이 진주를 비롯한 경상우도 지역에서 급속하게 확대되자 조선의 개화정권과 일본 측은 각각 대비책을 강구했다. 조정과 감영에서는 대구판관 지석영(池錫永)을 토포사(討捕使)로 임명했다. 그는 통영의 관군 및 군수지원을 받으며 진주와 하동 등지의 농민군을 진압했다.

전봉준과 김개남은 10월이 오기를 기다려 기포(起包)하기로 하고 각 도의 동학접주들에게 통문을 보냈다. 전라도의 각 군현에서 활동 중인 동학농민군들은 일제히 봉기했다. 10월 하순을 전후해 전북 삼례에는 10만여 명의 농민군이 모여들었다. 순천의 박낙양은 5천여 명을 동원했다.

2차 봉기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남접과 북접의 동학조직이 연합해 논산에는 최소 10만여 명의 농민군이 집결했다. 이들은 농민군을 이끌고 공주를 점령하기로 결정했다. 음력 10월 16일 전봉준은 논산에서 양호창의령수(兩湖倡義領袖)의 이름으로 창의를 알리는 고시문을 충청도 관찰사에게 보내 동참할 것을 호소했다. 음력 10월 하순 농민군은 공주 웅치(熊峙, 곰티재)에서 일본군과 격전을 벌였다.

일본 측에서도 영호도회소가 하동을 점령할 무렵부터 농민군의 동향을 주시하며 군대의 파견을 심각하게 고려했다. 일본 측은 농민군의 세력기반을 없애야만 조선에서의 군사 활동이 원활하다고 판단했다. 11월 5일 일본군과 지석영이 이끄는 관군이 합류했다. 이후 12월 초순까지 조일 연합군과 농민군 사이에서는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졌다.
 

구 진상역
구 진상역. 과거 섬거역이 위치했던 곳으로 농민군 세력이 강했던 섬거역은 하동의 주요 전투지였다.
유이혜경 작
광양지역 동학농민혁명을 소재로 유이혜경 씨가 쓴 책 <잊혀진 사람들>


/최혁 기자 kjhyuckchoi@hanmail.net


/정유진 기자 jin1@namdo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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