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에 걸친 동학농민혁명 수십만명 희생자 남기며 끝나

<108. 광양의 동학농민혁명>(完)
1년에 걸친 동학농민혁명 수십만명 희생자 남기며 끝나
전봉준·손화중·김인배 등 농민군 지도자 체포·처형
최초의 반봉건·반외세 운동…항일의병, 3·1운동 계승
 

체포된 농민군
1894년 음력 11월 농민군 1만여 명이 우금치전투에서 크게 패하고, 그중 500명 정도만이 살아남았다. 음력 12월 말에는 전봉준을 비롯한 동학 지도자들이 체포됐다./동학농민혁명기념관

광양·경상지역 농민군에게 전세는 점차 불리해졌다. 음력 11월 6일 농민군 지도자 임석준(林石俊)이 토포사 지석영에게 체포돼 곤양군 성북 시장에서 효수됐다. 8일 새벽에는 하동의 안심동(安心洞) 뒷산인 금오산(金鰲山)에 집결한 수백 명의 농민군이 기습을 받아 수십 명의 사상자가 나왔다. 농민군 수천 명은 일본군과 관군에게 맞서 싸우다 186명이 죽고 2명이 체포됐다. 화약 30관, 한국 돈 6관 790문, 우마 19두, 쌀 5두, 총 136정, 칼 18자루, 창 54자루 등을 빼앗겼다.

음력 11월 16일 광양 구등산(龜嶝山) 위에 있던 농민군이 일본군 148명의 습격을 받아 목숨을 잃었다. 관군과 일본군에 비해 전술과 무기가 열악했던 김인배와 농민군은 크게 패했다. 경남 서부의 농민군과 부산까지 진격해 일본세력을 물리치려던 계획이 좌절되고 말았다. 9월 말부터 영남 지역으로 진출하려 했던 농민군은 관군과 일본군의 막강한 공격에 수세로 몰렸다.

음력 11월 20일 수천 명의 농민군이 하동으로 향했다. 한 부대는 섬거역에 진을 치고 다른 한 부대는 섬진강을 향해 나아갔다. 그러나 토포사 지석영이 김인배의 의도를 간파하고 일본군과 군사들을 매복시켜 농민군을 포위하고 급습했다. 김인배와 농민군은 크게 패했고, 섬진강을 건너다 빠져 죽은 농민군이 3천여명이나 됐다.

음력 12월 7일 광양읍성에 주둔하고 있던 김인배를 비롯한 1천여명의 농민군이 수성군의 공격을 받았다. 치열한 싸움을 벌였지만 김인배와 농민군 200여명이 목숨을 잃었다. 이렇게 영호도회소의 주력부대가 모두 무너졌다. 바로 그날 김인배의 머리가 객사에 걸리고, 봉강면 접주 박홍서 등 농민군 23명도 총살됐다. 수접주 유하덕과 농민군 200여명은 그 다음날부터 차례로 죽임을 당했다.

영호대접주 김인배는 체포되기 전 함께 활동하던 조씨 성의 처남에게 “장부가 사지에서 죽음을 얻는 것은 떳떳한 일이요, 다만 뜻을 이루지 못함이 한이로다. 나는 함께 살고 함께 죽기를 맹세한 동지들과 최후를 같이할 것이니 그대는 집으로 돌아가 부모를 봉양하라”고 전했다.

전봉준은 전국의 동학조직에 통문을 보내 분발을 촉구했다. 그는 관군에게 “같은 민족으로서 서로의 전투를 중지하고 일본을 몰아내자”고 간절히 호소했다. 전봉준의 농민군은 12월 초순 우금치전투에서 패했다. 이후 1895년 음력 1월 전봉준에 이어 손화중 등 동학농민 지도부 대부분이 체포되고 교수형에 처해져 동학농민혁명은 결국 실패로 끝났다.

고부민란을 시작으로 1년간에 걸친 동학농민혁명은 농민군 30~40만의 희생자를 낸 채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하지만 반봉건·반외세를 표방하며 일어난 최초의 민족운동이었다는 데 큰 의의가 있다. 또 여기에 참가한 동학농민군은 뒤에 항일의병항쟁의 중심세력이 됐고, 3·1독립운동으로 계승되는 발판이 됐다. <끝>
 

김인배 접주 등 동학군이 처형당한 곳
1894년 음력 12월 7일 영호도회소 접주 김인배와 수접주 유하덕을 비롯한 농민군 100여명이 광양의 전 군수 김석하가 이끄는 민포군에게 체포돼 이곳에서 처형됐다. 광양 봉강접주 박흥서 등 100여명의 농민군도 잇따라 처형됐다./위직량 기자 jrwie@hanmail.net

/최혁 기자 kjhyuckchoi@hanmail.net

/정유진 기자 jin1@namdo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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