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의 조세개혁(2)

세종의 조세개혁(2)

<김세곤 호남역사연구원장>
 

#1. 1430년 8월 10일에 호조는 세종에게 공법(토지 1결당 10말의 정액 징수)에 대한 전·현직 관리들과 17만 백성들의 가부(可否) 의견을 낱낱이 아뢰었다. 이날의 실록은 자그마치 1만9천자, A4 용지로 18페이지 분량이었다.

먼저 조사 개요부터 살펴보자. 조사기간은 1430년 3월부터 8월까지 5개월간이었다. 3월 5일에 세종이 여론 조사를 지시하여 4개월 후인 7월 5일에 호조가 중간보고를 했고, 8월 10일에 최종 보고를 했다.

조사대상은 중앙정부 육조는 물론이고 각 관사와 도성안의 전·현직 관리, 각도의 감사·수령 및 관리부터 여염집의 세민(細民)을 망라했다.

조사방법은 300여명의 관리가 전국 가가호호를 방문하여 의견을 직접 듣는 형식이었다.

조사내용은 토지 1결당 10말 정액 징수에 대한 찬반이었는데, 단순히 찬반을 묻는 폐쇄형 조사가 아닌, 공법의 편의 여부와 답험손실법의 폐해 시정방안 등도 묻는 개방형 여론조사였다.

한편 세종문화회관 지하 ‘세종이야기’ 전시실에서 열린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주최 제6회 유권자의 날 기념 특별전 ‘선거, 대한민국을 만들다’에는 세종의 세법 여론조사를 ‘장장 5개월에 걸쳐 총인구의 4분의 1에 달하는 17만여 명이 찬반의사를 밝힌, 우리 역사상 최초의 국민투표라 할 만했다. 백성들과 직접 소통하고자 했던 세종대왕의 민본사상이 잘 담긴 역사적 사례라고 했으나, 세종의 개방형 여론 조사는 찬반 중에 하나만을 선택하여 기표하는 지금의 국민투표와는 엄밀히 말해서 거리가 멀다.

#2. 8월 10일에 호조는 세종에게 서울의 전·현직 관리의 가부의견부터 시작하여 경기·평안·황해·충청·강원·함길도(함경도), 경상도, 전라도의 가부의견을 제시하고, 마지막에 “무릇 가하다는 자는 9만8천657명이며, 불가하다는 자는 7만4천149명입니다”라고 아뢰었다. 이에 세종은 황희 등의 의논에 따르라고 명하였다. 황희 등의 의견은 현행 답험손실법을 유지하되, 폐단 구제 방안을 마련하자는 것이었다. 세종은 황희의 세제 개혁 반대도 받아들였으니 참으로 열린 임금이었다.

그런데 찬성률이 57%였는데도 세종은 왜 조세개혁 법안을 곧바로 시행하지 않고 재검토를 지시했을까? 근본적인 이유는 전답 1결에 조(租) 10말 정액징수에 대한 찬반의견이 지역별로 편차가 너무 컸기 때문이다.

전국 팔도 중 경기·경상·전라도 3개도는 찬성이 압도적으로 많은 반면에 함길·평안·황해·충청·강원도 5개도는 반대가 훨씬 더 많았다.

경기도는 찬성이 1만7천76명, 반대가 236명으로서 찬성률이 98.6%였고, 경상도는 찬성 3만6천262명, 반대 377명으로 찬성률이 98.8%, 전라도는 찬성 2만9천505명, 반대 257명로 찬성률이 99.1%로 토지 1결에 10말 정액 징수에 대하여 압도적으로 찬성하였다.

반면에 함길도(함경도)는 찬성 75명, 반대 7천387명으로 찬성률이 1.1%, 평안도는 찬성 1천326명, 반대 2만8천474명으로 찬성률이 4.5%, 황해도는 찬성 4천454명, 반대 1만5천601명으로 찬성률이 22.3%, 충청도는 찬성 6천982명, 반대 1만4천13명으로 33.1%, 강원도는 찬성 939명, 반대 6천888명으로 찬성률이 12%에 지나지 않았다. 더구나 함길도·평안도는 극력반대의 목소리가 높았다.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났는가? 조선 팔도의 전답은 기름지고 척박한 것이 지역에 따라 너무 다른데, 즉 함길도·평안도 같은 산간의 전답과 경상도·전라도의 평야의 전답은 수확량에 확연한 차이가 있는데도 이를 전혀 고려하지 않고 일률적으로 토지 1결당 10말의 세금을 정액징수 하겠다는 호조의 법안이 처음부터 문제가 있었던 것이다. 개혁 법안이 오히려 지역별로 ‘부익부 빈익빈(富益富 貧益貧)’을 초래할 우려가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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