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지 않는 것들이 주는 행복

보이지 않는 것들이 주는 행복

<유근기 전남 곡성군수>
 

어르신들의 분분한 술자리 말씀.

“곡성도 인자는 삐까번쩍 광좀 내야 되잖어?” “뭐이 불만인가? 옛날에 비하면 천국일세.” “뒤만 보고 사는가. 관광객들이 전국에서 몰려오는디 쫌 거시기해. 요즘 이런 멜캉 시골스런 데가 어디 있당가!” “이런! 요새는 촌시런 것이 더 값진 거여! 웰빙, 친환경, 에코, 자연보호 몰러?” “웰빙? 에코? 로보트가 이세돌이하고 바둑 두는 세상이여!”

신문의 아파트 분양광고를 보면 교통 편의성에 이어 내세우는 게 생활 인프라다. 보육시설, 공원, 의료기관, 복지시설, 문화시설, 체육시설을 자랑한다. 자고 먹고 자식들과 어르신들 부양하고 쉬는 일상생활 유지에 필요한 시설들이다. 그래서 삶의 질이란 생활 인프라에 크게 좌우된다.

하지만 우리 수준은 부끄러운 편이다. 1인당 GDP는 세계 15위, 서울의 삶의 질은 전 세계 221개 도시 중 80위다. 개발이 도시 중심으로 이뤄졌기 때문에 지방은 말할 것도 없다. 의료기관은 7%, 보육시설은 16% 정도가 농촌에 있다. 농촌에는 도로, 교량, 하천, 공원, 담장, 빈집, 경작로, 저수지, 용수로 등등 잠깐 훑어봐도 할 일이 태산이다.

그러나 생활 인프라는 일상생활 영위의 기본요소일 뿐 행복의 조건은 아니다. 곡성을 행복하게 만드는 것들은 따로 있다. 마을 할매와 아짐들이 ‘행복 바우처’를 흔들며 나들이 가신다. “나라에서 할멈들한테 용돈을 다 줬다네.” 행복 바우처라는 카드는 여성 농업인들에게 발급해 주는 복지 차원의 작은 지원이다. 1년에 10만 원. 그러나 명절 때 손주가 쥐어주고 간 용돈만큼이나 가상하다. 일 년 내내 농사로 허리 한 번 펴지 못하고, 단돈 천 원도 아까워하는, 짠하디 짠한 곡성의 아짐들과 할매들을 위로한다.

뭐 하시냐고 물어본다. “응, 이것저것 다 해.” “미장원에도 가고 찜질방에도 가고 자장면도 묵고….” 노동에 찌든 마음 좀 펴시라는 지원이다. 대처에 취직해 돈 버는 손자가 내려와서 “맛있는 것도 사 묵고 옷도 사 입으시라”고 척 안기고 가는 푸근한 용돈 10만 원. 그럴 때 사정없이 뿌듯해지는 할머니의 마음이 바로 ‘행복 바우처’의 마음이다.

행복 바우처는 곡성의 미용실, 수영장, 시장, 놀이공원, 서점, 목욕탕, 음식점 등등 여러 곳에서 요긴하게들 쓰신다. 작은 소비가 모여서 문화가 돌고 경제가 돌고 행복이 돈다. “누가 우리덜한테 신경이나 써 줬간? 요것 있응게 맘 편하게 빠마도 하고 목욕도 하고 주전부리도 하네.” 농촌 여성들은 위로를 받을 권리가 있다. 땅만 파며 살아온 한평생, 소비도 사치도 모르고 살았던 분들에게 웃음과 여유를 돌려드린다.

‘마을 공동급식’제도는 행복 바우처보다 더 감동스러운 장면을 연출한다. 이제는 마을 사람들끼리 모이는 것도 점점 줄어드는 세상이기에, 농번기를 핑계 삼아 밥상을 같이하는 모습이 경이롭다. 도시에서는 처량하고 외로운 혼밥(혼자 먹는 밥)이 일상화되었다지만 공동급식 자리에는 늘 ‘우리’가 있다.

“다 심어 가는가? 끝나면 손 좀 빌리세.” 이런 부탁도 할 기회가 되고, “얼음물 챙기소, 일사병 걸리네.” 걱정도 챙긴다. “한술 더 묵어.” 다독여 주고는 지나가는 나까지 부른다. “어이, 밥 묵고 가소.” 한 끼 식사라도 사람들과 어울려 즐겁게 먹는 것이야말로 힘든 노동에 대한 위로이자 고단한 몸에 대한 예의이다. 이만으로도 삶은 행복에 조금 더 가까워진다.

의료시스템까지도 농부들을 위로해 준다.

평생의 농사에 병을 달고 다니시는 것이 나이든 농부들이다. 그러나 의료혜택이 쉽지는 않다. “엥, 광주까지 가야 한다고? 환장하네, 소는 누가 멕이라고.” 난감하다. 하루를 몽땅 바쳐 외지에서 진료를 받다 보면 일상이 흔들리고 비용도 걱정된다. 그래서 ‘농업인재활센터’는 더없이 고마운 존재다. 부담 없이 자주 들러 몸을 돌볼 수 있다. 노후 건강을 체계적으로 관리해 주는 지속 가능한 행복시스템이다.

오지마을 어르신들의 발 노릇을 하는 효도택시, 어디든지 천원이면 갈 수 있는 천원버스, 혼자 사는 어른들을 염려하는 고독사 예방 조례, 습지가 살아 있는 청정 자연, 아이들의 미래를 걱정해주는 직업체험관들은 진정한 행복인프라가 뭔지 설명해주는 것들이다.

누구나가 일상에서 행복감과 만족감을 느끼며, 편리한 생활을 누리고 적절한 소득을 올리면서 안전하고 평화롭게 살 수 있는 곳. 곡성은 아직 완벽하지 않지만 지향점은 확실하다. 그것은 ‘행복’이다. 곡성은 행복이 구체적으로 실현되는 소프트웨어가 장착된 곳이다. 부산스럽거나 화려하지 않지만 오래 누릴 수 있는 영속적인 가치들이 보이는 곳이다. 그것들로 인해 곡성의 삶의 속도는 지금도 매우 안정적으로 흐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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